[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귀영바위의 굴은 깊이가 대략 130㎝, 높이 120여 ㎝ 정도로 성인 남자 한 명이 들어앉을만한 작은 공간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귀영바위 굴에 앉아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하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 무렵은 소태산 대종사가 귀영바위 집에서 가사책임과 함께 구도 생활이 이어지면서 ‘구도의 자세’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 시기다. 가슴에 맺힌 의문을 산신령이나 도사에게 구하려 했던 자세에서 자신 안에서 찾게 되는 과정으로 변화되는 때였다.

그 때문에 귀영바위의 굴은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에 있어 중요한 역사의 배경이 된다. 또한 가사책임을 위해 귀영바위 집에서 밥집을 운영했다는 점에서 귀영바위 집터의 자리가 어디였느냐를 고증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귀영바위 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집이 위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가운데, 이 자리를 두고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현재 성지고등학교 정문에서 15m 정도 떨어진 곳에 귀영바위 집이 있었다는 의견과 또 하나는 귀영바위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10m 거리의 길가(현재 정자가 위치한 쪽)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원기93년(2008) 귀영바위 집터 고증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당시 함께 참여했던 오타원 임선양 원로교무는 어릴 때 길가(정자 쪽)에 주막이 있었던 것을 봤고, 동네 주민 몇 명도 동의해 그곳에 주막집이 있었음을 증언했다. 

하지만 당시 박용덕 교무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승산 김형오 구술자료’를 예로 들며 “소태산 대종사의 주막은 1913년에 허물어졌고, 오타원님이 어릴 때 봤다던 주막은 1930년 이후에 생긴 것이다”며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의견임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박 교무는 사진 자료를 내놓았다. 동그라미로 하얗게 집 위치를 표시한 사진으로 현재 성지고등학교 정문 15m 지점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주장이었고, 실지로 사진의 위치는 그곳임이 확실했다. 또 이 사진의 위치는 귀영바위 집터를 설명한 김형오의 구술과도 일치했다. 다만 문제는, 이 사진이 제시하는 위치가 귀영바위 집터라는 주장이 신뢰할 수 있는가였다. 이에 대해서는 원기28년(1943)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추모의 정이 깊어 영산성지 촬영을 추진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당시 이리읍에 소재한 동양사진관 사진사를 데리고 영산 일대 성적지를 촬영한 일도 있었다. 귀영바위 집터도 그때 찍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귀영바위 집터는 당시 영산지부 감원으로 근무했던 사타원 이원화 선진의 고증으로 찍었을 개연성이 높을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당시 이재철, 이순순, 오창건, 박동국, 유건 선진이 생존하고 있을 때인데, 이때의 사진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현재 정확한 귀영바위 집터는 성지고 정문 앞 부근이라는 주장과 정자가 들어선 방향이라는 두 주장이 계속 남아있다. 

[2023년 9월 27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