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어느날 제자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마당을 쓸고 있습니다.” “누구의 마당을 쓸고 있느냐?” “원불교의 마당을 쓸고 있습니다.” 그러자 소태산,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린다. “너의 지금 일은 세상의 마당을 쓰는 일이고, 우주의 한 곳을 정갈히 쓸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국이 터진다.” 소태산 당시의 일을 각색했다.

‘공간의 마음’이 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따듯한 느낌의 공간이 있는가 하면, 어쩐지 썰렁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또는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는 공간이 있다. 이는 대체로 그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축적됐기 때문이다. 곧,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 쓰임 여하에 따라 그 기운이 자연 공간에 어려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발길을 꺼리는 공간이 있다면 이는 그 곳에 머무는 기운이 사람들을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은 울타리가 되고, 그곳은 구성원들의 결국 ‘마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종교는 세상의 것이라 한다. 종교 공간은 누구나 편히 드나들 수 있어야 하고, 그곳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묶는 공간이기에 특정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종교가 하는 일은 세상일과 통하는 것이고, 종교인들은 자기의 헌신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일을 하는 사람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래서 종교 성자들은 세상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알았고, 세상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승화했고, 세상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알아 고뇌했다. 

하지만 요즘, 자꾸 자기만 바라보고 사는 종교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걱정을 세상이 하고 있다. 세상을 걱정해야 할 종교인이 세상일을 팽개치고 자기 속으로만 움츠러 들기에 세상이 오히려 종교를 걱정한다. 이는 욕심에 뿌리 내린 돈병이거나, 상대를 공격함으로써 자기 자리를 얻으려 하는 세속병이거나, 진리에 천착하기보다는 편안과 사사로움에 더 관심을 갖는 무지가 그 근원일 것이다.  

종교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병들고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 탐욕으로 세상을 불바다로 만드는 사람, 가늘게 흔들리는 바람에도 영혼이 두려워지는 사람들을 바로 세우는 일이 종교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세상일은 내팽개치고 우리들만의 세상 속에서 다시 세속과 똑같은 행태로 뺏고 빼앗기며 서로를 갈라놓는 일에 골몰한다면 어찌 종교가 바로 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종교인의 깨달음은 자기 성취를 뛰어 넘어 세상구원으로 나설 때 가치가 있다. 

소태산 대종사, 농구를 메고 오는 산업부원을 가리켜 ‘우리 집 부처’라 했다. 비록 밭일을 하고 있으나 그것이 곧 세상일을 하는 마음을 담아 하는 일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우리만 바라보며 움츠러들지 말자. 마음은 울타리가 없고, 세상에는 할 일이 많다. 

[2023년 10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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