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단다. 중국 당나라 조주선사에게 한 학인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물었다. 조주는 ‘없다’고 답했다. 의문의 1패라더니, 괜히 가만 있는 개들만 참 안됐다. 이곳 원광선원에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개, 무무와 하늘이가 있는데, 이 아이들이 들으면 얼마나 낙심할꼬. 기억력 없다는 물고기나 닭도 아니고, 나름 머리 좋기로 인정받은 동물인데, 하필 개한테 불성이 없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게다가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열반경에 딱 나와 있는데, 개들이 글 못 읽고 말 못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들고 일어났을 판이다. 

누군가 내게 한 술 더 떠, “사람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조주처럼 ‘없다’고 답할 것이다. 무엇을 들어 말해도 답은 마찬가지다. 견성하지 못한 이에게는 알려줘 봤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 얕은 지식으로 묻기 좋아하는 이에게는 여차저차 답해줘 봐야 머리만 커져 깨달음의 장애물만 늘린다. 깨달음은 말장난이나 진리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일이 아니다. 

머리로 진리를 이해하려는 고준한 논쟁자들을 조주는 특별히 경책하며,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며 소위 ‘끽다거(喫茶去)’ 한마디로 보내버렸다. 깨달음의 장애물을 하나라도 줄여주려는 자비다.
 

본성에서는 부처도 조사도 없이

오직 공적영지심 하나뿐.

깨달은 이는 개에게 불성이 있냐고 묻지 않는다. 묻는 이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깨치지 못한 이에게는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못 알아듣긴 마찬가지다. 법신불 자리를 모르니 나와 개를 분리해, 개에게 불성이 있냐고 지식 머리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에게 ‘있다’고 답하면 건성으로 넘어갈 게 뻔하니, 법문과 다르게 ‘없다’고 답해 생각 노선에 혼란을 일으켜 준 셈이다. 

진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이들을 대할 땐, 그가 있음에 집착하면 없다고 답하여 그 굳은 관념을 깨주고, 없음에 집착하면 있음으로 보여줘서 빠져나갈 사량계교의 문을 다 막아야 한다. 머리로 도달할 수 없을 때 스스로 깊은 참구 끝에 문 없는 문이 열린다. 

따로 있는 불성은 없다. 개와 사람을 구별 짓는 자리에서는 무엇을 답해도 다 맞지 않다. 오직 나눠지지 않은 유일한 법신불만 있을 뿐, 나와 너, 개나 고양이로 따로 나눠진 불성은 없다. 사실, 깨달은 자리에서는, 진공으로 보면 ‘없다’고 답할 수 있고, 묘유로 보면 ‘있다’고 답할 수 있다. 있다 해도 맞고, 없다 해도 맞으니, 있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다고 답하고, 없음에 집착한 이에게는 있다고 답해 관념을 깨주는 것일 뿐, ‘있다/없다’가 핵심이 아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했다. 부처와 조사가 따로 있다는 분별심을 가지면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본성에서는 부처도 조사도 사람도 개도 중생도 없이 오직 공적영지심 하나뿐이다. 분별심으로 묻는 이에겐 있다고 해도 잘못이요, 없다고 해도 잘못이다. 아는 이는 있다 해도 알아듣고, 없다 해도 긍정이라, 자성 자리에서 염화미소로 소통한다. 

모름지기 선문답은 말없이 뚫는 자리며, 깨친 사람끼리 소통하는 방식이고, 무지한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앞뒤 안 맞게 화두를 던지는 일이니, 부디 머리에 속지 말지어다. 오직 분별 사량만이 요물이니, 부처인 무무야 하늘아, 걱정말고 불성 자리에서 신나게 뛰놀거라.

/변산원광선원

[2023년 10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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