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법장·조선익 부부 교도
강법장·조선익 부부 교도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교당이 의지처가 됐죠. 원불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정말로’ 삶이 달라지는데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강법장 동해교당 교도회장과 그의 부인 조선익 교도가 말한다. ‘원불교에서의 신앙생활이 어려웠던 자신들의 삶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고.

송공원 교무(동해교당)은 “신앙생활로 역경을 잘 이겨낸 공부인이다. 지금은 교당의 든든한 주인으로, 늘 공중사에 힘써주는 봉공인으로 살고 있다”는 말로 강 교도회장 부부를 소개했다.

 

교당은 마음의 의지처
40여 년 전부터 수산업에 종사해온 부부는 한때 수산물 도매 납품으로 꽤 큰 규모의 사업장을 운영했었다. 냉동창고나 건조실에 명태, 대게 등의 수산물을 수입해와 국내 업자에게 도매로 넘기는 일이었다. 일도 잘되고 사업 규모도 꽤 넉넉했으니, 큰 어려움 없이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원만한 삶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쯤 큰 시련이 찾아왔다. 운영하던 사업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약속어음을 빌려주고, 돈을 받지 못해 부도 위기를 맞게 됐어요. 그 당시 금액으로 1억이 넘는 액수였으니, 꽤 큰 규모의 사고였죠.”

결국 부부는 부도를 맞게 됐고, 몇 년간 공들여온 일터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이들의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사업장을 다시 살려 보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정말 힘들었던 것은 우리 때문에 다른 이들까지 어려움을 겪게 됐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부도를 막아보려 빚을 얻고, 갚지 못하면서 우리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됐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어요.”

그렇게 1년여 세월을 고생스럽게 보냈다. 하지만 이들의 성실함과 정직했던 생활은 주변 인연들로부터 다시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신용의 담보가 됐다. 거래처 사람들과 주변 인연들의 도움이 이어졌고, 이들은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자녀를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맨손으로 다시 시작하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 무렵 동해시에 원불교 교당이 들어섰다. 교당에는 마침 조 교도의 초등학교 친구였던 이정길 교무가 부임했다. 익산이 고향이고 어릴 때부터 교당에 다녔던 조 교도는 친구 교무를 따라 교당에 나가게 됐고, 그때부터 기도 생활로 마음의 의지처를 삼았다.

“처음엔 남편이 이상한 종교에 다니게 됐다고 걱정했어요. 그러다가 교전을 보고 법회 참석도 해보면서 안심하고 교당에 다니는 것을 인정해줬습니다.”

조 교도는 교당에서의 기도 생활로큰 힘을 얻었고, 그렇게 몇 해를 보내며 두 부부가 함께 어려운 고비를 이겨냈다. 빚도 다 갚고, 국가에서 지원했던 신용대출금도 모두 갚았으며, 사업장도  다시 예전처럼 운영할 수 있었다.
 

두 번의 사업장 부도, 신앙 생활로 극복할 수 있었다
아들의 사법고시 합격,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 돼

기도 생활, 어려움을 이겨낸 힘
2002년 한일월드컵으로 전 국민이 환호하던 그즈음이었다. 부부에게 또다시 큰 시련이 찾아왔다. 러시아 대게 회사에 선수금을 보냈는데, 몽땅 떼이고 회수할 길이 없었다. 5억여 원의 재산을 그냥 잃게된 상황. 또다시 부도, 이제는 정말 가망이 없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피눈물이 났다.

부인인 조 교도는 어떻게든 자녀들이 대학을 잘 마치도록 학비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의 집 식당 일을 무보수로 도와주며 요리를 배웠다. 그렇게 식당을 열고 장사도 하며, 다시 한번 일어서보려 안간힘을 썼다. 남편인 강 교도회장 역시 어떻게든 재기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세상일은 마음 같지 않았다. 절망이 계속됐다. 그러다 보니 강 교도회장은 술로 보내는 날이 늘었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남편도 걱정됐어요. 그때마다 마음을 의지할 곳은 교당이었고, 항상 기도로 견디며 살았습니다.”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렇게 그의 절박한 기도는 계속됐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성균관대학교 법대에 다니던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아들은 혹 부모님이 너무 기대했다가 떨어지면 크게 낙심할까봐 2차 고시 때는 시험 기간도 말하지 않았다. 아들의 합격 소식에 강 교도회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면서 다시금 마음을 챙기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합격 소식에 희망을 갖게 됐고, 용기를 얻게 됐죠.”

강 교도회장은 이날부터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술을 끊기로 하고 입에 대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도 금주·금연 생활을 지키고 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교당 법회 출석에도 정성을 모았다. 아내의 기도에 대한 감응처럼 느껴졌고, 이제는 함께하는 교당에서의 신앙생활이 그의 생활표준이 됐다.

“그때부터 아내를 따라 열심히 교당을 다니게 됐고, 새롭게 다시 살아보자는 각오로 삶이 변화됐습니다. 생활도 달라졌고 교전 말씀으로 살아가고자 다짐도 했죠.” 이후 강 교도회장은 어떤 일이든 ‘교당’을 먼저에 뒀다.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 교당의 인연이 깊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교당 일에 먼저 나선다. 올해 초 이웃 교당에서 어린이집을 정리 할 때도 사람들을 모아 해결에 앞장섰고, 교당의 크고 작은 일에 항상 먼저 서왔다. 부부는 교구에서도 역할한다. 강 교도회장이 교구 청운회 부회장, 조 교도는 교구 봉공회 부회장을 맡아 손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2023년 10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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