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진 교무
오덕진 교무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새해를 맞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10월입니다. 올해에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는데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알려주신, 만사를 이루는 원동력을 얻는 공부법 중 그 첫번째인 신(信)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만사(萬事)’는 사전적으로는 ‘여러 가지 온갖 일’이지만 마음 작용하는 법(用心法)으로서 만사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그’ 일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신(信)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原動力)이니라.”(진행사조) 믿음에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믿으라는 걸까요? 무엇을 믿어야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공부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몰라서 헤매지 않도록 ‘일원상의 신앙’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주셨습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제불 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으며,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으며,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이니라.”(일원상의 신앙)

‘일원상의 신앙’을 생활 속에서 바로 대조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해주신 공부법이 ‘일상수행의 요법’입니다. ‘분별이 없는 자리’, ‘변함이 없는 자리’, ‘끊어진 자리’, ‘돈공한 자리’는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원래 (분별이) 없건마는’으로 표현됐습니다.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는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경계를 따라’로 표현됐습니다. ‘분별이 나타나며’, ‘차별이 생겨나며’, ‘완연하여’, ‘드러나는’은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있어지나니’로 표현됐습니다. 
 

일원상의 진리인 대소 유무의 이치를 믿는 사람은
만사를 이루는 방법이 나오는구나!

‘일원상의 신앙’은 “원래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묘~하게 분별이 있어지는구나?!”를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상대방이나 내가 마주한 상황을 대소 유무의 이치(전체와 부분과 변화)로 바라보고 신앙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신 겁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면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을 얻게 됩니다. 원동력은 어떤 움직임의 근본이 되는 힘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목표’를 정하는 원동력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라는 겁니다. 만사를 이루려 할 때 온 우주가 내가 이루고 싶어 하는 일을 잘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느냐? 아닌 것 같습니다. 일이 풀릴 때도 있지만 앞을 막는 일도 생깁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장애에 부딪히면 의욕을 잃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의 성질인 것 같습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사람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을 만났을 때 속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속더라도 속는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나 상대방을 전체와 부분과 변화로 보기 때문에 지금 안 풀리는 것이 ‘부분’이지 ‘전체’는 아니구나, ‘변화’가 되겠구나! 하고 난경(難境)이 순경(順境)되는 이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정말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그 방향을 바라보고 ‘마음을 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진규의 희망>이라는 책을 쓴 서진규 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1971년 가정부를 모집한다는 직업소개소의 광고를 보고 아는 사람이 없는 미국으로 혼자 갑니다. 마흔세 살에 하버드 석사 과정에 입학해서 쉰여덟 살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진규 씨에게 어떻게 그 일을 다 해냈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When you know ‘what’, ‘how’ will show up” 무엇을 할지 아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할까’의 방법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을 얻으면 어떤 역경과 난경을 만나도 속지 않고 경계를 따라 있어진 그 마음을 공부하면서 ‘어떻게 할까’ 방법이 나옵니다.

해외에서 성공한 한 사업가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좋은 인연이든 낮은 인연이든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앞길을 막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 자리에 없을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그 사업가는 대소 유무의 이치를 모르지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해독(害毒)인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은혜였구나?!’를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인 대소유무의 이치를 알고 믿으면 먼 훗날이 아니라 경계를 대했을 때 바로 대조해서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을 얻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나의 만사는 무엇인가요? 내가 이루고 싶은 만사를 생각해보면서 막연한 신(信),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소태산 대종사께서 밝혀주신 ‘용심법(用心法) 신(信) 공부’로 만사를 꼭 이루길 염원합니다.

/대명교당

[2023년 10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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