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벽에 걸린 달마를 걷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선사에게 열세 살짜리 이청풍이 벌떡 일어나 걸어간다. “어라~, 저 아이가 뭘 좀 아네.” 선사가 다시, “움직이지 말고 도를 보여 줄 수 있느냐”하니, 방아 찧던 절구를 들고 그대로 멈춰 서 있다. 깜짝 놀란 선사가 무릎을 치며, 십삼세각(十三歲覺)이라고 견성인가를 내린다. 평소 선사의 문답 유형을 파악한 소태산 대종사는, 이런 질문에 이렇게 하라고 어린 청풍에게 미리 모범답안을 일러 놓았다. 그 몰래카메라 각본대로 속는 선사를 보고, 웃음 참느라 힘드셨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일, 견성이 선각자들의 모범답안들을 외워 해결된다면 석 달 열흘이라도 세상 모든 답안들을 외울 의향이 있을 것이다. 영생 문제 해결에 그깟 백일을 투자 못할까. 문제는 머리로 외운 지식은 견성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천재라도, 혹은 모든 과학적 원리에 다 통달한 이라도 견성과는 별개다.

견성인가를 내리는 일은 지극히 정밀한 테스트를 필요로 한다. 진리를 잘 설하거나 실천하는 것을 보아서는 그 사람의 견성 여부를 결코 알 수 없다. 일체의 심신작용이 모든 이의 추앙을 받을 만큼 훌륭하고, 진리에 대해 잘 설한다 해서 그것이 곧 견성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언행으로 한 사람의 깨달음의 여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인 자리에 머물면
무엇이 움직여도
성품이 한 것이다.

그 자리를 아는 이라야 상대방의 견성 진위를 알아볼 능력이 있다. 먼저 전 방위적으로 정밀히 문답하여, 눈동자의 미동도 없이 막힘없이 답이 나오는가를, 여러 질문들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진리를 그대로 말하는지를 정확히 봐줘야 하는데, 머리로 이해한 것을 조합하고 있는 증거가 바로 눈동자의 움직임이라 즉시 들통난다.

기출문제의 답을 다 외워서 답하는 제자들 때문에, 선사들은 계속 다른 질문들을 만들어 냈다. 이런 선사들의 테스트 문항을 화두·공안·의두·문목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화두라 부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두들은 선각자가 제자들의 깨침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 항목이면서, 깨침을 유도하는 문구가 되기도 한다. 

본성에서는 일체 유정·무정·우주만물이 오직 법신불, 한 몸이다. 본성에 머물면 나 아닌 것이 없으니 달마와 나는 같다. 일체가 나이며 일체의 움직임이 본성인 내가 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달마와 내가 하나라, 내가 걷는 것이 곧 달마가 걷는 것이다. 걷는 것만이 아니라, 달마를 말하게 할 수도, 노래하게 할 수도, 춤추게 할 수도 있다. 

성품은 오직 하나며 나눠진 성품은 없다. 일체는 성품 하나가 운영하니, 일체 만물의 본성은 동일하다. 우주 만물은 이 본원, 일원, 법신불, 성품 하나가 낳고 기르고 운영하고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사라져가게 한다.

내가 따로 있다는, 나의 운영자가 이 몸 안에 따로 있다는 생각만 버리면 곧 깨달음이다. 일체 우주 만유는 그 운영자가 안에 따로 있지 않고 온 우주로 훤히 열려 있다. 달마의 운영자도 바위의 운영자도 개의 운영자도 성자의 운영자도 허공의 운영자도 우주의 운영자도 사람의 운영자도 오직 하나, 우주 가득한 텅 빈 만능자 일원, 법신불, 성품, 본원이다. 

그 하나인 자리에 머물면 무엇이 움직여도 성품이 한 것이다. 일체의 작용은 성품의 작용이다. 이쪽에서 작용해도, 저쪽에서 작용해도, 하나인 성품이 한 것이다. 

성품자리에서는 달마와 내가 하나이니, 자, 그럼 지금 당장 달마를 환히 웃게 해보시라.

/변산원광선원

[2023년 10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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