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3년(1918), 영광 길룡리 해변을 간척하다

정관평 큰 언답, 원기28년(1943) 촬영/오른쪽 위 정관평 준공기념 제명바위

원기2(1917) 가을, 소태산 대종사는 회상 창립 준비로 제자들과 저축조합을 설립하고, 허례폐지·미신타파·금주단연·근검저축·공동출역 등의 새 생활 운동을 전개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먼저 가산을 처분해 출자하고, 조합원들이 동참해 저축금을 확보했다. 이때 숯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숯값이 폭락해 팔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자 저축조합은 그들을 위해 숯을 매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숯값이 폭등해 많은 이익을 보게 됐다.

원기3(1918) , 소태산 대종사는 조합원들에게 길룡리 해면(海面)의 간석지(干潟地)를 방언(防堰)해 처음부터 공익의 길로 나아가자고 했다. 8인의 조합원은 사량계교 없이 복종하고 순일(純一)한 마음으로 지사불변(至死不變)하겠다는 서약을 올렸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직접 방조제 공사를 감독했고, 조합원들은 정신·육신·물질로 전력했다. 주위의 수많은 비평과 조소, 한여름의 무더위와 한겨울 살을 여미는 바닷바람 속에 약 1년 동안 바다를 막아 완공했다.

완공 후에는 옥녀봉 기슭 바위에 이름을 새겨 방언공사를 기념했다. 간척답을 후에 정관평(貞觀坪)’이라 이름했고, 정관평은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의 자작자급, 주경야독, 영육쌍전의 현장이자, 초기교단의 경제적 기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기41(1956)에 재방언 공사를 해 도합 5만 평이 넘는 농지가 확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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