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 대각지 집터에 세운 만고일월비(제막식사진).
노루목 대각지 집터에 세운 만고일월비(제막식사진).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을 이루기 전 노루목(대각터) 빈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귀영바위 집은 관리도 잘 안되었던 곳이었고, 또한 여름에 장맛비로 인해 무너지게 된 사정이 있어서다. 

이 무렵 소태산 대종사는 김성섭(팔산 김광선)의 주선으로 선운사 산 너머에 있는 친지의 초당에서 3개월간 적공의 시간을 갖고 돌아와 다시 입정의 시간을 보낸다. 

25세(1915)의 청년 소태산 대종사가 입정에 들었던 노루목 집은 부엌 1칸에 방 2칸으로 된 초가집이었으며,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얻은 후로도 오랫동안 이곳에는 사람이 살았다. 1918년에는 영촌의 김봉서라는 사람이 탄생가 옆으로 집을 짓는데, 노루목 집의 재목이 쓸만하다며 가져가 4칸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현재는 소실됨).

소태산 대종사는 20세부터 24세까지 귀영바위 집에서, 25세에는 변변한 이불 한 채 없이 노루목 집에서 지냈다. 노루목 초가집에서도 소태산 대종사는 엄동설한 찬방에서 구도의 열정을 불태우며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는 간절한 염원으로 입정에 들었다. 머리는 제대로 상투를 틀지 않아 산발이라 사람의 행색이 아닌 정도였으며, 손발은 얼어 터지고 수염에는 입김에 얼음덩어리가 가득 맺혔다고 한다. 하지만 구도의 정성은 변함이 없었고 다만 어찌할 방도를 몰라 우두커니 있는 상태였다. 이 기간은 소태산 대종사 대각을 이루기 전까지의 대 입정(入定)의 시간이었다.

이 때 뒷바라지를 해주며 후원했던 인물이 김성섭(팔산 김광선)과 바랭이네(사타원 이원화)였다. 바랭이네는 소태산 대종사를 시봉했고, 노루목의 샘터에서 한밤중이나 새벽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기도를 올렸다. 
 

사타원 이원화가 기도를 올렸던 우물.
사타원 이원화가 기도를 올렸던 우물.

한번은 바랭이네가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 처사 양반 발복(發福)하여 영광 고을 원님이 되게 해주소서” 하고 기도 올리는 모습을 본 소태산 대종사가 “그까짓 고을 원님이 다 뭔가? 공들이려면 신묘생(辛卯生) 박처화(朴處和) 세계 만국만민을 다 구제해주는 만국양반이 되게 해달라고 비소”라고 했고, 이후부터는 바랭이네 “처화 어른 만국양반 되게 해주소서” 하며 정성을 올렸다.

김성섭은 노루목 집에서 고행하던 소태산 대종사의 처지를 알고 매일 아침 아들(형산 김홍철)을 시켜 조밥 한 그릇을 몰래 가져다줬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를 두 때로 나누어 소금국에 먹었다고 전해진다(<대종경 선외록> 구도고행장 4절).

또한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 후에 회고하기를 “나는 쑥을 보면 송구스럽다. 그것은 나의 밥이었다”고 말하며 길에 난 쑥을 밟지 않고 꼭 돌아 가셨다고 한다. 대각을 이루기 전까지 쑥버무리로 배를 채우며 고행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예화다.

[2023년 10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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