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안 선진이 열반하자 소태산 대종사,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불법연구회의 반을 떼어주고라도 살리고 싶다”고 하셨다.

구인선진 중 한 명인 김기천 선진이 열반했을 때도 소태산 대종사는 “가는 기천도 섭섭하거니와 우리의 한 팔을 잃었소”라며 허허 통곡하셨다. 마찬가지로 김광선 선진을 먼저 떠나보내면서도 소태산 대종사는 “이십여 년 고락을 같이 하는 가운데 말 할 수 없는 정이 들었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성자의 눈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만 이를 통해 소태산의 인간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회상을 창립하면서 개척의 역사에 동참한 이들을 보내는 아쉬움이 흠뻑 배어 나온다. 만약이긴 하나 이동안 선진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원불교 경제의 기초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또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최초로 견성인가를 받은 김기천 선진의 열반이나, 소태산 대각 전부터 늘 가까이서 정성을 다해 보살펴온 김광선 선진의 열반은 ‘개척의 역사에 중요한 동행자’였기에 성자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최근 머나먼 북유럽 핀란드 탐페레에서 개척교화의 역사에 나선 젊은 교무의 애써 참던 눈물이나, 태국 방콕에서 개척의 역사를 한창 써나가고 있는 여성 교무가 목메임을 가장해 억지로 참아낸 눈물에는 ‘원불교’가 가득했다. 이들은 먼 이국에서 고독을 달래며 세상 사람들에게 원불교를 알리기 위해 개척과 도전과 모험을 마다치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 눈물은 보석이 되었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흠뻑 적셨다. 이처럼 원불교의 눈물은 100년을 갓 지나오는 간난한 역사 속에서 ‘개척’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다.

지금 교단은 급변하는 시대의 패러다임 위에서 새로운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신생 종교이기에 미처 성숙되지 못한 제도와 열악한 교화환경으로 인해 쉽게 흔들리고, 도전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도 재가출가 구성원들은 한결같은 순수함과 자기희생을 발판 삼아 새로운 개척의 역사를 써가는 데 혼신의 힘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니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묵묵하고 더디게 가는 게 답답하다고 조바심을 내서는 안 된다. 

지금 교단에는 긍정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긍정은 긍정을 잉태하고 밝음은 더 밝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설사 부정이 끼어들더라도 이는 긍정으로 가기 위한 일시적 어둠이며, 그 기착지는 결국 긍정이고 밝음이다. 만약 부정을 수단 삼아 부정을 목적한다면 이는 분탕질에 다름없다. 해가 뜨면 어둠이 자연 거둬지는 것이지, 어둠을 억지로 걷어낸다고 해가 뜨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교단이 아프다.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힘이나마 합하고 보태는 마음으로 ‘다시’ 교단 4대를 ‘개척’해 가야 할 것 같다. 

[2023년 10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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