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예쁘게, 그리고 맛있게 익어가는 계절이 돌아왔다.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계절이 더없이 반갑지만 금세 지나갈 걸 아니 바쁘다. ‘이 예쁘고 맛있는 계절을 어디서 더 만끽할 수 있을까.’ 조금 엉뚱하게도 오일장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풍성한 계절의 수확물들이 있을 것이고, 또 그곳에서는 분명 보기만 해도 배부른 풍경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예상은 오일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적중했다. 조선시대 말에 시작됐다고도 하고, 1923년에 문을 열었다고도 하는, 뭐가 됐든 100년 역사에는 부족함이 없는 인월 오일장으로 향하는 길. 지리산 자락 아래 위치한 시장이다 보니, 가까워질수록 가을빛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풍경이 눈에 든다. 설렘이 커진다. (본 글에서 인월 오일장은 인월장과 겸해 사용한다.)
 

오일장의 시작은 동글동글
누군가, 시골 오일장은 아침 일찍 찾아야 한다고 했다. 좋은 물건은 점심시간 이전에 대부분 동난다는 것이다. 덕분에 부랴부랴 나서느라 아침밥을 걸렀더니, 시장 입구에서 걸음이 멈춘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찹쌀 도너츠를 지나칠 수 없는 탓이다. ‘본격 투어에 나서려면 배가 든든해야지.’ 나름의 취재 원칙(?)을 핑계 삼아 지갑을 연다.

투명한 비닐봉지에 든 찹쌀 도너츠 위로 흰 설탕이 솔솔 뿌려진다. 갓 만들어져 따뜻하고 쫄깃하다. 주인은 밀가루 반죽을 떼 길쭉한 모양으로 밀고 돌돌 만다. 꽈배기 모양이다. 

“아직 꽈배기는 안 구우신 거죠?” “그렇죠. 이것도 사연이 있어요. 처음에는 꽈배기를 먼저 구웠는데, 그러다 보니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도너츠를 먼저 만들어요. 동글동글 하루가 잘 풀리라고.” 그 마음을 받아 먹었으니, 내 하루도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다.
 

그는 이곳 인월에서만 15년째, 서울에서부터 시작한 ‘제과제빵’ 경력을 치자면 30년째라고 했다. 오늘은 인월, 내일은 장성… 관촌과 창평도 간다. 말하자면 지역의 오일장을 돌며 장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돌뱅이’다. 

그는 “장돌뱅이로 사는 삶이 재밌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원칙을 하나씩 풀었다. ‘첫 손님은 돈을 받지 않는다’, ‘오늘 쓸 만큼 벌었으면 더 욕심내지 않고 장사를 접는다’,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즐기면서 재밌게 한다’ 같은 것들이다.

그는 손으로 쉴새 없이 꽈배기를 만들어내면서도 앞에 선 손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배도 채웠겠다, 시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가 말한다. “이따 다시 와요. 꽈배기 하나 줄게.” 
 

오일장에서는 의미 없는 정량
인월장은 날짜의 뒷자리가 3일과 8일일 때 열린다. 그래서 삼팔일장(3·8일장)이라고도 한다. 날짜가 정해져 있어도, 사실 요즘 시장의 대부분은 상설시장을 겸하지 않던가. 하지만 인월장은 다르다. 정말로 장날(날짜 뒷자리 3·8일)에만 열리는 것이다. 또 인월장은 경남 함양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화개장터 못지않은 ‘영호남 화합의 장터’도 된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쪽은 화개장터, 북쪽은 인월장이 지방의 대표 장터인 것이다. 이곳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들은 듯하다면,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시장은 한가운데 십자형(+)으로 길이 나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도 시장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한 것이란다. 길의 가운데와 양쪽으로는 나이 지긋한 상인들이 직접 길러 가지고 나온 갖가지 농산물이 즐비하다. 그중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에 눈길이 향한다. 가을을 알리는 대표 농산물, 밤이다.
 

“이거 하나 먹어봐.” 어떻게 알았는지, 어르신이 깎은 생밤을 건네며 발길을 붙잡는다. ‘오도독’ 단단한 단맛이 돈다. 대야 한가득 담긴 밤은 어르신이 직접 농사짓고, 직접 주운 것이라고 했다. 한 됫박을 달라고 했다. 돈을 내며 “제가 밤을 진짜 좋아하거든요” 했더니 두 손 가득 두 번, 거의 한 됫박 정도가 더 담긴다. 오일장에서 정량, 정 무게는 의미가 없다더니… 역시나다. 추가금도 당연히 없다.

어르신은 63년째 인월장에 나온다고 했다. 아들․손자와 함께 지금도 5천 평 농사를 짓는단다. 시장을 두어 바퀴쯤 돌고 다시 찾아갔을 때, 어르신은 대야를 가리키더니 “다 팔고 이것만 남았다”며 웃었다. 일행이 사고 싶어 했던 자연산 송이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누구가,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이’ 사가서 다 팔리고 없었다. 뿌듯함이 담긴 어르신의 말에 일행은 사고 싶었던 송이 대신 남은 밤을 모두 달라고 했다. 어르신은 “아이고, 그러면 내가 미안한데” 하며 또 한 번 환히 웃었다.
 

직접 길러 각양각색
인월장 내 풍경 중 유독 시선이 머물던 데가 있었다. 바로 배추가 실려있는 경운기다. 신선함을 이보다 더 잘 증명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다. 배추를 직접 길러 나왔을 농부는, 손님이 나타나면 경운기에서 배추를 바로 내려 턱턱 망에 담아 실어줬다. 

“어르신, 손을 좀 찍어도 될까요?” 쪽파를 다듬던 어느 어르신의 손에도 카메라 렌즈가 향한다. 밭에서 캐온 듯 흙 묻고 잔뿌리 무성하던 쪽파는 어르신의 손을 거쳐 곱게 빗은 머리카락처럼 단정해졌다. 또 다른 어르신이 좌판에 올려놓은 애호박은 생김새가 각양각색이다. 똑같지 않아 오히려 믿음이 가는, 희한한 마음이 든다.

농사지은 양파를 비닐봉지에서 꺼내 바구니로 옮기던 한 어르신. 누군가 다가와 “얼마냐” 묻고 “달라”고 하자 바구니에 담긴 것은 물론이고 봉지에 남아있던 것까지 단돈 6천원에 모두 건넨다. 이 어르신의 인월장 세월은 50년째. “이거 팔아서 약 사 먹는 데 다 쓴다”는 말에는 반 농담, 반 진담이 함께다.
 

인월 오일장에 담긴 여러 시간을 헤아려본다. 100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 속에서 인월장은 세월과 연륜을 쌓아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수고로움의 가치를 펼쳐놓고 인정받는 곳’이 되어왔다. 

생각해 보면 마트에서는 정갈한 물건만 볼 뿐, 그 물건을 키워내고 길러내고 만든 사람의 이야기까지는 잘 보지 못한다. 하지만 시장, 그중에서도 오일장에서는 물건과 사람 그리고 그 안의 시간과 정성이 함께 모여 보인다.

■ ‘100년 더The 공간’은 오래됐지만 가치 있는, 또는 소멸되고 쇠퇴해가는 것을 다시 꺼내 살려내는 공간·마음·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23년 10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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