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던 소녀는 아직 수교가 맺어지지 않은 러시아어학과에 지원한다. 나라간 수교는 그가 학부를 졸업한 후에야 이뤄졌다. 나라간 수교 2년 만인 1992년 유학을 떠난 그의 이름은, 러시아 땅을 밟은 민간인 명단 첫 장에 기록됐다. 낯선 땅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그는 읽고 또 읽던 러시아 문학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문학에서 시작돼 훗날 그 땅에 한국문화를 알린 전 주러시아한국문화원장 위명재 교도(법명 묘전, 원남교당)의 이야기다. 

할머니들이 매주 연극 보러 가는 나라
“당시 러시아는 물자도 부족하고 여러모로 척박했지만,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을 무척 사랑했어요. 농사짓는 할머니들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잘 차려입고 연극을 보러 갔고, 누구나 시 몇 편쯤은 외우고 있었죠. 문화적으로 깊고 넓은 토대를 갖추고 있었어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러시아 유학 박사로 돌아온 그는 공무직으로 향한다. 당시 활발해지는 국제 수교 및 교류와 관련, 국제관계전문직 5급 특별채용이 활발했다. 이후 그는 통일부와 러시아 현지를 오간다. 통일부에서는 통일정책실, 정세분석국, 개성공단사업지원단에서 근무했고, 해외 근무로는 모스크바 극동문제연구소에 이어 2011년 주카자흐스탄한국문화원장직에 파견된다. 당시 여성으로서 최초 재외 한국문화원장이라 화제가 됐다.

“카자흐스탄에 세종학당을 세워 한국어를 교육하고, 국립대학교에 제2외국어로 한국어 과목을 신설했습니다. 당시 카자흐스탄은 한류에 대한 관심이 크고 한국어 수요가 큰 상태였어요. 고려인들이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도 했고, 우리와 외형이 거의 같다 보니 친근하게 느꼈죠.”

K-컬처에 대한 러시아·CIS(독립국가연합, 소련 해체 후 독립한 국가들의 국제기구) 국가의 관심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이후 주러시아한국문화원장이 되어 고향 같던 모스크바로 돌아간 그는 날로 높아가는 K-컬처의 위상을 실감했다. 문화적으로 원류격인 러시아의 관심은 한류 중에서도 전통적인 데 쏠렸다. 판소리나 사물놀이, 전통춤에 열광했고, 그는 자주 한복을 입고 현지인들을 맞았다. 

당시 러시아에서 ‘한국문화원’은, 현지 젊은이들에게 꿈을 향한 역량과 가능성을 키울 수 있는 디딤돌이었다.
 

수교 직후 러시아 유학 박사로, 국제관계전문직 외교관
카자흐스탄·러시아 한국문화원장으로 K-컬처 전해
모스크바에서 입교, 마음공부 믿음으로 가족교화 이뤄

동양문화, 일본문화에서 한국문화로
돌아보면 그는 K-컬처의 역사 그 자체였다. 1980~1990년대부터 쌓아온 언어능력과 현지 감각을,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류를 펼치는 데 쏟아온 셈이다. 그때까지는 ‘동양문화’가 곧 ‘일본문화’이던 분위기를, 위 전 원장과 당대의 재외 한국문화원들은 ‘한국문화’로 바꿔냈다.

“러시아나 CIS 국가들에게 한국은 이미지가 참 좋아요. 우리와 가장 큰 공통점은 가족 중심, 관계 중심이라는 점입니다. 척박했던 조건 속에서 공동체로 살던 역사가 있었고, 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서구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하니 개인 중심인 서양문화와 맞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해도 쉽고 호감 가는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것 같아요.”

덕분에, 러시아·CIS 국가에는 한국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이 풍부하다. 이는 한국의 종교 원불교가 안착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정’이나 ‘공익심’이, 그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타교당과 러시아 모스크바교당이 세계교화의 성과를 이룬 데에는 이런 강점이 작용한 것이다. 

“2005년에 후배(류법인)를 따라 모스크바교당에 갔어요. 원래 불교철학이나 명상에 관심이 많아 절을 찾고 있었거든요. 당시 전도연 교무님께 마음공부를 배우는 한편, 수시로 들러 그냥 앉아있기도 하고 밥도 얻어먹었죠.”

해외와 한국 근무를 번갈아 하며, 한국에서는 원남교당에 나갔다. 나라 안팎을 오가도 신앙은 하나이던 가운데, 어머니 임유행 시인(법명 도화)도 입교해 도반이 됐다. 그의 가장 최근 러시아행은 주러시아한국문화원장으로, 다시 찾은 현지에서 그는 세계교화의 격세지감을 느꼈다. 

“초창기에는 고려인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20~30대 현지인들이 많더라고요. 과연 이들이 왜 원불교에 올까 유심히 봤더니, 신앙이나 기도보다는 마음공부를 하러 오는 거였어요. 효과를 보고 삶이 변한 청년들이 친구를 데려온 거죠. 그때 생각했습니다. 교당은 참 여러 기능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공부를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요.”

‘요즘 MZ세대는 종교를 기피 한다’는 말에도 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젊은 직원들을 보면, 마음의 기준을 잡기 위한 나름의 노력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눈높이에 맞춰 얘기할 길만 찾으면 된다는 믿음이 있다. 그의 20대 조카들(김후조, 김정인)을 입교시킨 배경도 여기에 있다. 

두 세계가 열릴 때 종교가 역할해야
“마음의 힘이 필요한 또다른 분들이 바로 탈북민이에요. 낯선 사회에 정착하는 데에는 기능이나 노하우보다 마음의 힘이 중요합니다.”

지난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탈북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원 근무를 자원했다. 무대를 러시아-한국에서 북한-남한으로 옮겨온 셈이다. 한쪽의 세상을 다른 세상에 전하는 일. 이는 그가 평생을 해온 일이며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원불교라는 세상을 세계에 전하는 ‘교화’에 대한 그의 조언을 귀하게 담아야 한다. 

“남북이든 러시아든 다른 갈등의 어디든, 언젠가는 해빙돼 두 세계가 서로 열릴 것입니다. 그때 종교가 할 일이 많아요. 정서적․문화적 통합을 위해 무엇을 할지 준비할 때입니다.”

[2023년 10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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