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유일신을 믿지 말라. 사실상 유일신은 따로 없다. 참된 종교는 유일신이 따로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이다. 신은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다. 신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없다. 마음에 상대가 없으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싸울 상대 자체가 원래 없다. 

‘따로 있는 신을 누가 믿는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믿어야 할 신이 따로 없어서다. 신이 하늘 어디에 따로 있으며, 어디까지가 신이 계시는 하늘인가. 어딘가에 따로 있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체가 신 아님이 없이 그대 자체가 곧 신이다. 

유일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이 따로 있고, 신을 믿는 내가 따로 있다는 말이니, 명제 자체가 잘못됐다. 정확한 진실은 신이 곧 나요 내가 곧 신이다. 하나이기에 믿음을 받는 자와 믿음을 내는 자가 둘로 나눠지지 않는다. 믿는 대상과 믿는 자는 동일자, 즉 나 자체가 신이다. 그러니 ‘내가 유일신을 믿는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이 본래 하나임을 확인한 것이 깨달음이다. 유일신이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유일신이다. 티끌 하나 제외 없이 우주 전체가 한 몸, 유일신임을 확인했다면, 한 몸인 나를 해치는 싸움이나 전쟁은 일어날 일이 없다. 상대가 끊어진 자리를 아는 이들은 평안하고 지혜로우며 복 받고 진급하는 이들이다. 

내 편 네 편을 갈라 싸움을 즐기는 이는 어리석고 유치하며 불운하고 불행하다. 자신과의 싸움이든 상대와의 싸움이든 지역이나 종교, 정파, 나라 간의 싸움이든, 싸움이 많은 이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한다는 특징이 있다.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이
본래 하나임을

확인한 것이 깨달음.

따로 있는 유일신을 설정해 믿는 이들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늘 싸움을 품고 사는 모순에 빠진다. 잘못된 신념 때문에 필연적으로 적이 만들어진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잘못된 믿음이 강할수록 상대에 대해 배타적이다. 쉽게 말해 다 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벌이는 싸움은 가장 위험하며, 빠져나갈 출구가 없는 재앙이다. 신앙의 명목하에 목숨 걸고 싸우니 극단적 형태가 되며, 남을 죽이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신의 가호로 미화하고 정당화한다. 잠시 협상해 전쟁을 멈췄어도, 싸움의 요소는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대 주위와 전 지구, 나아가 우주의 평화를 위해서는, 하루빨리 모두 깨달음을 얻어, 유일신을 따로 믿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와 신은 하나라서 유일신이다. 일체가 한 몸, 천상천하에 오직 나 하나, 우주 일체 만물이 먼지 하나도 제외 없이 하나라서 유일신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나와 일체가 한 몸이니 유일신이 곧 나다. 어리석은 이들은 이 말을 잘못 해석해, 따로 있는 유일신이 있다고 믿으며, 그 유일신을 따로 있는 내가 믿는다고 여긴다. 내가 따로 있고, 내가 믿는 신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면, 참된 가르침을 만났어도 유일신을 믿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온 우주에 나밖에 없는데 누가 누굴 믿을 수 있는가. 그저 하나 자리에 머물 뿐이다. 

모두가 유일신이며 하나의 몸, 법신불이다. 법신불을 떠난 화신불은 없으며, 화신불이 곧 법신불이다. 예컨대, 세포 없이 이 몸이 구성될 수 없듯, 세포 하나가 전체이며, 전체는 세포들로 구성되니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나는 세포가 아니라 전체 몸이 곧 나다. 

온 인류, 온 우주가 한 몸, 법신불, 오직 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하고 급한 일인지, 통곡의 심정으로 기도하는 요즘이다. 결국 다 나의 일이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변산원광선원

[2023년 10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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