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진 교무
송상진 교무

[원불교신문=송상진 교무] 최근 한 동료가 나에게 예상치 못한 칭찬을 해줬다. “그레이스, 당신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나요?”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자동반응으로 “아, 칭찬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하려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내가 정말로 잘 듣는 사람일까?’ 

사실 나는 서구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교육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동조하듯 자주 머리를 끄덕이거나, ‘네 말이 맞아’, ‘그래그래’, ‘와우 진짜’와 같은 리액션을 중간중간 넣어야 한다는 것, 상대방에게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눈을 직접 마주쳐야 한다는 것도 반복된 교육을 통해 배웠다. 

잘 듣는 것은 지속적인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다. 친구나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아마존 패키지(택배)는 집 앞에 잘 도착했는지’ 걱정하거나 대화와는 아무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상대방의 말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을 준비한다거나, 오히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답안’을 생각하는 데 몰두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때는 잠깐 마음을 멈춰 보자.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좋은 청취자처럼 보여지는 훈련을 했는가’ 혹은 ‘진정으로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상기해보자. 그렇다고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혼자만의 생각에만 몰두하여 상대가 온전히 자신을 표현할 여유를 주지 않는 태도는 정말 무례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들음’은
수동적이 아닌
완전한 참여를 필요로 한다.

기본적으로 ‘적극적인 청취’란 상대의 판단이나 원하지 않은 충고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사람이 가장 진실된 자신을 공유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여유가 있다면 말을 중단시키거나 논쟁하는 상황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제안으로 신임을 받으려고 하거나 회의 전에 미리 내가 원하는 결론을 가지고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정말 ‘드물게’ 듣는다. 

상대가 말하는 것을 통제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다. 상황을 먼저 통제하려고 하면 진실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눈까지 모두 가려진다. ‘진정한 들음’은 수동적이 아닌 완전한 참여를 필요로 한다. 

지금 온몸으로 잘 들어주는 연습을 함께 잠시 해보자. 당신은 무엇을 듣고 있는가. 내면의 잡담을 잠시 멈추고, 당신을 둘러싼 소리, 미세하거나, 큰 소리이거나 아무 소리가 없거나, 전체적인 존재감으로 조용히 들어 보자. 소리에 판단의 꼬리표를 붙이려 하지 말고 그저 단순히 들려짐을 받아들여 보자. 상대의 의도만 잘 이해가 되는 게 아니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묘한 들음까지 들을 수 있어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성취할 수도 있다. 우리가 온전히 듣기 위해서는 습관적 생각이나 내적 잡담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 적극적인 들음은 스스로에게 “스스로 지금 여기에 있나요?”를 항상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안이 조용해서 상대의 말이 잘 들려야 한다. 

나는 살면서,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목격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하고, 우리의 존재가 피해를 주지 않고 도움이 되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실수를 줄이고 싶어한다. 그러니 주의가 흩어질 때마다 새로운 정신을 차려서 주의깊게 잘 듣는 것이 왜 의미 있는지 떠올려야한다. 

잘 듣고자 하는 당신의 단순한 의도는 힘든 일과를 보낸 사람을 곧바로 치유할 수도 있으며, 오늘 바로 당신이 진정으로 잘 들어준 최고로 멋진 사람, ‘귀가 큰’ 부처님이 될 수 있다. 거룩한 법문은 말하기 앞서 잘 들어주는 것에서 이미 자비의 치유가 일어난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3년 11월 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