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불생불멸은 ‘참 나’를 알지 못해 허덕이는 괴로움의 대표선수 셋 중, 죽음에 관한 불안과 괴로움을 단박에 벗어나는 해법이다. 

어디서 왔느냐? 깨침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선각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순진하게 ‘서울에서 왔습니다’ 하고 자기 사는 곳을 대면 바로 아웃이다. 진리를 모른다는 반증이니 순식간에 테스트는 끝난다. 

스승의 테스트 방식을 미리 눈치채고 ‘온 바가 없습니다’ 하고 답을 제법 잘해 용케 무지함을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 예리한 스승은 몇 차례 더 꼬아 질문을 만들어 결국 항복하게 만든다. 곧장, 눈 앞에 있는 성품을 보면서 답해야 하는데, 외운 범주를 벗어나면 머리에서 답을 찾느라 눈동자 굴리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든다. 머리로 이해하고서는 진리를 안다고 속아 사는 이는 어리석고 불행하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확인하는 것이 깨침의 준비 자세다. 

아는 이는 어떤 질문을 비틀고 꼬아서 물어도 한 치도 속지 않고 곧장 눈앞의 답을 드러낼 줄 안다. 물을 마셔본 이는 어떻게 말을 해도 다 같은 물맛을 표현해 낸다. 견성은 다 같은 성품을 보기 때문에 표현은 조금씩 달라도 같은 말이 나온다. 어떤 질문도 성품자리에 대한 확인이어서 눈앞의 그것을 곧장 답하면 된다.
 

참 나, 일원, 성품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는가를 묻는 것.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은, 참 나, 일원, 성품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또한, 생사해탈이 가능한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나는 우주에 가득히 있는 텅 빈 것, 공적영지심이다. 가득 차 있으니 움직일 수가 없다. 온 우주에 나밖에 없으니 어디서 올 수도, 어디로 갈 수도 없다. 성품의 체는 온 우주에 가득해 더 나아갈 공간이 없다. 움직일 수 없으니 오거나 갈 수가 없다. 전체에 있는 텅 빈 그것이 바로 나다. 변화하는 것은 육근, 오온, 심신이며, 참 나는 여여해 오고 가지 않는 성품 자체다. 불생불멸이라 나는 죽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는 여여한 불성 자체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이 자리를 명확히 확인한 것이 견성이다. 견성하지 않으면 생사해탈이 되지 않는다. 그 자리를 확연히 깨치면, 나는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음을 알기에, 생사해탈을 할 수 있게 된다. 생멸 없는 자성에 머물러 살면, 육신의 생사에 아무 구애가 없으며, 결국 생로병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견성하지 않은 이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해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잘 받아들이더라도 생로병사의 윤회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생로병사로 윤회하는 수레바퀴를 벗어나 자유와 해탈을 얻으려면 견성이 필수다. 생사해탈은 견성에서 출발한다.

스스로 깨칠 마음은 내지 않고 늘 성자들의 법문에만 의지해 사는 것은, 평생 독립 못하고 부모에 의지해 사는 미성년 자녀와 같다. 부모는 미성년 자녀가 되기를 바라지 않듯, 성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 깨쳐 성자가 되기를 바란다. 깨달음이 가장 급하고 중요하다.

성자의 말씀을 받들고 실천하는 것만 집중하는 이는 결국 자유와 해탈을 얻는 성자가 되지 못한다. 평생을 성자들이 성품에 대해 설 해 놓은 가르침에 의지해 살 뿐, 스스로 거미줄을 생산해내지 못한다. 우주에 가득해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육근으로 나를 삼고 살다 간다. 그대는 어디에 사는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11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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