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4년(1919),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만나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이 이뤄진 정읍 화해리 김해운 가의 옛 모습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이 이뤄진 정읍 화해리 김해운 가의 옛 모습

정산 송규 종사는 원기2(1917) 스승을 찾아 경상북도 성주에서 전라도로 넘어와 구도하던 중 김제 모악산 대원사에서 정읍 화해에 사는 김해운(金海運)을 만났다. 정산종사는 김해운의 청에 의해 그의 집으로 와서 기도와 주송(呪誦)으로 적공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첫 교화단(敎化團)을 조직하며 중앙위(中央位)를 비워 두고 간혹 밤하늘 별들의 운행을 살폈다. 원기3(1918) 영광에서 방언공사(防堰工事)를 시작한 직후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는 김광선(성섭)과 김해운의 집을 방문해 스승을 만나고자 기다리며 머물던 정산종사를 만나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해 여름 영광 영산에 도착한 정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와 다시 만나 형제의부자의(父子義)’로 고쳐 맺고 부자(사제)지간의 예를 올렸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를 교화단 중앙위에 오르게 해 교화단을 완성하고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이며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제법주(制法主)”라 했고, 정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의 은혜에 대해 나는 친히 찾아 이끌어 주신 한 가지 은혜를 더 입었노라고 하며 나는 사은(四恩)이 아니라 오은(五恩)”이라고 말했다.

원기23(1938) 김해운 모자(母子)는 그의 집에서 교화를 시작해 정읍지역 교화의 모태(母胎)가 됐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는 화해제우지(花海際遇地) , 정산종사가 기도 올렸던 기도봉에 영주(靈呪) 친필 기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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