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으로 반신불수 된 남편의 오른쪽으로 살아온 13년
교당 못 나간 대신 헌공 시작, 신문 기사·광고마다 희사
할머니 신심 대물림, 이름도 내색도 없이 곳곳에 복 지어

고순일 교도
고순일 교도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남편이 마흔여덟에 풍을 맞았다. 오른쪽 몸이 마비되니 잘되던 한의원도 문 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남매는 이제 중학생과 초등학생이었다. 하루아침에 남편의 오른쪽이 되어야 했고, 두 아이의 기둥이 되어야 했다. 당시 고순일 교도(개봉교당) 나이, 겨우 마흔이었다.

남편에게 입이자 펜이자 손이었던 아내
먹구름 속에도 볕이 들었다. 식사부터 목욕까지 다 도와줘야 했던 남편은 다행히 진맥만큼은 왼손으로 짚었다. 워낙 실력으로 유명했던 남편(故 초대안 중국한의원장)에게 환자는 끊이지 않았고, 고 교도는 남편의 오른쪽에 앉아 진맥 결과를 받아쓰고 약도 지어줬다. 그는 남편에게 입이었고, 펜이었으며, 또 손이었다. 하지만 6년 만에 남편에게 신부전증이 와서 투석을 시작해야 했고, 열반 2년 전에는 합병증으로 다리를 절단했다. 60㎏가 넘는 남편을 침대에서 내려 휠체어에 싣고 원광대병원 투석실 문을 열던 세월. 열반에 들던 날까지, 그렇게 13년이었다. 

“당시 투석비가 한 달에 백만원이었고, 첫째(초재승 인천사랑요양병원장)는 한의대, 둘째(초은영 무용가)는 무용학과를 다녔는데 그래도 남편이 진료를 오래 해줘서 그 비용을 다 댈 수 있었죠. 저도 한의원 일이 절실했어요. 할 수 있는 게 헌공 밖에 없었거든요.”

그때 그는 익산성지 새벽기도를 시작한다. 남편이 잠든 새벽 4시, 15분을 달려 익산성지에 도착하면 가슴 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뭉클 솟아났다. 성탑을 돌고 송대에서 기도를 올렸다. 함께 돌아가며 기도를 주관하던 3인방은 그와 최선각 원무와 박정원 원광대 명예교수. 그 세월이 꼬박 6년이었다.

“그 새벽기도는 정말 절실했고 간절했어요. 돌아보면 그 기도들이 저를 살게 해줬고, 신앙적 바탕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할머니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고요.”
 

중풍으로 반신불수 된 남편의 오른쪽으로 살아온 13년
교당 못 나간 대신 헌공 시작, 신문 기사·광고마다 희사
할머니 신심 대물림, 이름도 내색도 없이 곳곳에 복 지어

‘알았어 할머니, 나 원불교에 잘할게’
늘 자신을 교당에 데리고 다녔던 할머니(故 김정옥 교도, 이리교당)는 연원이자 신앙의 뿌리다. 익산시 주현동 집에서 함께 살던 할머니는 새벽이면 목욕 후 흰 기도복을 챙겨 입고 교당에 갔다. 늘 정갈하고 알뜰했던 할머니는 텃밭의 채소나, 돼지, 직접 만든 비누를 팔면 꼭 헌공금부터 챙겼다. 밥 지을 때마다 쌀을 두 줌씩 호리병에 담아 매달 보은미기도에 가져가던 할머니. 손녀에게는 그 모습이 곧 원불교요, 신앙 자체였다.

“열반하신 후, 제가 이사를 갈 때마다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서 법락을 하신 채 딱 앉아계셔요. 그러면 늘 약속을 했죠. ‘알았어 할머니, 나 원불교에 잘할게.’”

취업이나 결혼 등으로 원불교와 잠시 멀어졌을 때도, 마치 이 편에 할머니가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돌아왔다. 남편도 입교해 이리교당 청운회장까지 했고, 아이들도 교당을 집처럼 드나들며 살았다. 이렇게만 살면 될 줄 알았던 시절, 허나 남편이 쓰러지자 그 신심 지킬 길 없어 생각한 것이 헌공이었다. 

“교당을 못 나갈 때, 더러 단장님이 인사도 할 겸 단비 받으러 오셨어요. 저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났죠. 그렇게라도 복 짓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하던지….”

<원불교신문>의 모든 기사와 광고를 꼼꼼하게 보며, 계좌번호만 보이면 헌공금을 보냈다. 아깝다는 생각은 커녕, 더 못해 늘 안달이었다. 한 번은 300만원을 생각했는데 ‘500만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주머니를 탈탈 털어 맞춰 보냈다. 그러면 잊고 지냈던 돈이 보란 듯이 발견됐다. 위암 보험금 1억8천만원 중, 치료비로 3천만원만 쓰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보내는 식이었다. 원불교학과 육영장학회 희사는 월 30만원씩 1년짜리 적금을 들어 매년 갖다 내기를 10년째다. 2억2천만원에 매입했던 평화동의 상가 한 채를 희사한 내용의 2009년 <원불교신문> 기사를 얘기하니 그가 기억을 한참 더듬는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때 교구에서 잘 써주셨겠지요.”

이웃교당에 비 샌다고 공사비 보내
그 마음 여여해도 공덕을 존숭하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이라 그간의 총 희사금을 헤아려본다. 김관진 교무(개봉교당)와 머리를 맞댄 결과 10억이 훌쩍 넘는 금액이다. 김 교무는 그의 희사에 대해 “큰 몫으로 상 내는 것보다 가뭄의 단비처럼 어려운 곳에 나누신다”며 “최근에는 이웃교당이 비가 샌다는 소식에 공사비 몇백을 보냈다. 내 교당 네 교당을 넘어서는 이 어른의 심법이다”고 귀뜸한다. 비우면 비울수록 더 크게 채워지는 이치. 그에게는 그것이 경계를 넘어서는 힘이었고, 이생에 마무리하고픈 업장소멸의 길이다. 

“오랫동안 그런 기도를 했어요. 나이 들면 발길 닿는 곳마다 은혜를 심을 수 있게 해달라고요. 돌아보니 조금은 이뤄주시는 것 같아 모두 감사합니다.”

이제 일흔 줄, 위암 수술도 했고 장의 혹도 떼어냈다. 가진 것을 오직 원불교에 돌리며 ‘지금 죽어도 여한없다’고 생각하다가도, “좀 더 베풀고 가야 돼, 좀 더 공부하고 가야 돼”라며 추어잡는다.

“매일 일원상 서원문 50독을 하고, 사경과 일기, 천도법문도 빼놓지 않아요. 죽음 보따리 잘 챙겨서 마지막에는 대산종사님처럼 ‘개운하리 개운하리’ 하며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법명이 순일이던가. 이름도, 내색도 없이 기꺼이 내놓고 잊어버린 헌공의 세월. 그 귀한 마음이, 이렇게 비었으면서도 가득 차 있다.

[2023년 1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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