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사람 사는 세상에는 늘 시비가 따른다. 내가 맞네 네가 맞네, 이렇게 해야 되네, 저렇게 하면 안 되네 하며, 하루 종일 시비 속에 살아간다. 최종 의사결정이나 행동은 주로 윗사람이나 강자의 입장을 따르게 된다. 보통은 대수롭지 않게 상대방 의견에 따라주며 살지만, 큰 이해관계가 얽힌 일에는 승패가 있기 마련이라, 이긴 자는 좋아하고 진 자는 힘들어한다. 단순히 기분 문제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극단적으로는 죽고 죽이는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내가 맞고 저쪽이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옳고, 무엇이 완전히 그르며, 그 옳고 그름은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이쪽에서 각종 법과 논리를 가져다 자기편을 변론할 때, 상대방은 정반대의 논리와 법을 가져와 자기편을 정당화한다. 이쪽 말을 들어보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어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시비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정승 황희는 정반합 모든 편의 입장을 들어보고, ‘그래 네 말도 옳다’며 삼자의 말이 다 옳다고 말해 큰 덕인으로 추앙받았지만, 아무나 어설프게 따라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은 누군가의 입장에서 옳거나 그른 것이지, 절대적으로 옳거나 잘못된 것은 없다. 시대 따라, 지역, 경험, 성향 혹은 세대 따라 변하는 다양한 입장만 있을 뿐, 절대 불변의 옳고 그름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신간 편하고 업 덜 짓는 묘수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은 입장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인 자리를 모르니 괴로움의 근원인 상대를 만들어 항상 마음을 다툰다. 늘 내 입장, 우리 편 입장에 서서 살며, 설령 입장을 넓혀 우리 교단의 입장, 나라의 입장, 지구의 입장에 선다 해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다. 

그 모든 입장을 초월한 자리, 상대가 끊어진 자리에 서는 것이 바로 진리적이며, 깨달음의 경지다. 모든 괴로움을 초월하는 묘법은, 진리의 입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진리의 입장에 눈 뜬 것을 말한다. 

전체에 가득한 참 나인 진리의 입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 신앙과 수행의 요체다. 진공으로 체를 삼는, 진리의 입장에 머물러 있으면, 상대가 없고 일체의 시비에 끌림이 없는지라, 늘 여여해 마음에 일이 없다.

인간지사는 시비이해가 따르기 마련이라, 그 시대에 통용되는 법을 능히 따라주되, 또한 능히 무너뜨리기를 자유할 수 있어야, 괴로움과 싸움과 업을 벗어나는 해탈이 가능하다.

진리의 입장, 성품자리는 상대가 없어 시비가 멸하니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럽고 깨끗함, 옳고 그름이 없다. 텅 빈 본성은 하나라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 나 하나가 우주 가득하니 더러움을 느낄 자와 더러운 대상이 따로 없다. 즉, 시비가 끊어졌다는 말이다.

서로 연해 있는 하나의 큰 몸, 법신불 자리에 머물면 더럽고 깨끗함, 옳고 그름이 없다. 그 자리에서는 일체가 다 묘유일 뿐,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없다. 진리 아닌 상태, 진리 아닌 것을 먼지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그대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일체는 반드시 그러할 만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진리의 모습이며, 다 진리의 작용이다. 

진리의 입장에 머물면, 우주 가득 나밖에 없어, 나 아닌 것도 나 아닌 때도 없다. 그 자리는 불구부정이라 시비가 없어, 누가 누구를 괴롭힐 수 없다. 오직 나를 모르거나 떠나있는 것만이 사단이지, 텅 비어 하나인 자리를 알아 머물면, 울거나 잠 못 이룰 일이 없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1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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