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4년(1919), 산상 기도로 진리계의 인증을 받다

영산성지 법인기도봉, 원기28년(1943) 촬영
영산성지 법인기도봉, 원기28년(1943) 촬영

원기4년(1919) 봄, 영산에서 방언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를 “개벽(開闢)을 재촉하는 상두(喪-) 소리다”라며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 올리자”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9인 단원들과 4월 26일(음 3월 26일) 산상기도를 시작하며 단원들에게 ‘각자의 마음에 천의(天意)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으며, 몸에 창생을 구원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도록 지도했다. 


기도 장소는 교화단을 조직할 때 정한 단원의 각각 방위를 따라 정하되, 노루봉(중앙봉)을 중앙으로 잡고 8방을 맞췄으며, 음력으로 매월 6일, 16일, 26일마다 기도를 올렸다. 8월 21일(음 7월 26일), 최후의 기도일에 9인이 도실에 모였다. 이들은 청수를 도실 중앙에 놓고 각자 봉우리에서 창생을 위해 자결하기 위해 준비한 칼을 청수상 위에 올린 후,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후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 쓰인 백지에 손도장을 찍어 상 위에 올리고 결사의 뜻으로 엎드려 심고했다. 이에 혈인(血印)의 이적이 나타나자 소태산 대종사는 “천지신명이 감응하였고, 음부공사가 판결이 났다”고 했다. 


이를 원불교에서는 새 회상이 법계에 인증을 받은 ‘법인성사(法認聖事)’라 이름한다. 법인성사를 이룬 후에도 단원들은 기도를 계속 올리다가 동년 11월 28일(음 10월 6일)에 해제(解制)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는 단원들에게 법명(法名)과 법호(法號)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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