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교도와 출가교도의 제도에 차별의 벽이 높다는 지적이 오래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대체로 소태산 대종사가 펴낸 <조선불교혁신론>(원기20년) 중 ‘우리는 재가와 출가에 대하여 주객의 차별이 없이 공부와 사업의 등위만 따를 것이며, 불제자의 계통에 있어서도 재가와 출가의 차별이 없게 할 것이며’에 근원해 문제제기가 이뤄진다. 지금 교단 경영에 있어 재가와 출가의 차별이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23년 <회보>에 실은 “계문준행과 범계해설”에서 ‘30계문 중에서도 재가 회원의 편리를 위하여 속세 생활하면서도 지킬 수 있도록 20계문을 따로 뽑아서 정했다’며 출가와 차이를 뒀다.

곧, ‘예 아닌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자리에 좇아 놀지 말며’에 대해 괄호로 표시해 ‘본 조는 재가 회원에게는 관계가 없고 오직 출가 수도인에게 한하여 이행할 것으로 함’이라고 기록했다. 또 ‘회원 가운데 서로 금전을 여수 하지 말며’에 대해서도 ‘이 계문은 재가 회원에게는 관계없고’라고 표시했다. ‘연고 없이 담배를 피우지 말며’에 대해서는 ‘담배라 하는 것은 술과 아울러 현 사회 교제상 필수 물로 되어 있으나 근자 인심의 각성을 따라 스스로 금연하는 자도 많이 생겨나며’라고 설명한 후 ‘단, 이 계문은 재가 회원에게는 관계치 아니함’이라고 적고 있다.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말며’ 역시 ‘이 계문은 재가 회원은 관계치 아니함’이라고 하여 재가와 출가의 구분을 두고 있는 것이 특이점이다. 이 계문에 바탕 한다면 재가와 출가는 생활과 역할에서 ‘제도적’ 차이가 있음을 나타냈다.

특히 중앙총부가 조성된 후인 원기10년(1925) 4월, 정수위단 제1차 보결 및 대리조직에서 그해에 열반한 오산 박세철 선진의 방위를 보결로 뽑은 후, 당시 9인 제자 중 재가교도로 남아있던 이산 이순순,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선진의 방위를 전무출신으로 대리단원을 조직한 것은 그 역할에서 구분을 가지는 장면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출가자인 전무출신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소태산 대종사의 기준은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종경 선외록>에 기록된 법문에서는 ‘전무출신으로서 대중이 공인하는 경우 외에는 교당이나 기관을 떠나 생활하지 말며, 교중사(敎中事) 아닌 일에 종사하지 말라’고 엄격히 규제했다. 이뿐 아니라 ‘전무출신들이 돈을 벌어서 중인을 이익주리라 생각하면 남을 이익 주기를 커녕 공부심까지 떨어져서 필경 나와 갈리게 될 것이다’고도 경책하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일반 교무에게 훈시한 내용이다. ‘교무는 지방에 있어서 종법사의 대리라는 것을 명심하여, 그 자격에 오손됨이 없이 사명을 다해주기 부탁하노라.’(<대종경> 교단품 39장) 출가교도는 전무출신의 길이 있고, 재가교도는 재욕무욕(在慾無欲)해야 할 거진출진의 길이 있음을 살펴 알아야 한다.

[2023년 1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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