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호 교무
박윤호 교무

[원불교신문=박윤호 교무] 순혈주의란 순수한 혈통만을 선호하고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혈통은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원시 수렵사회에서 부족의 사냥 및 채집활동을 하는 과정 중 발생하는 ‘영역의 침범’을 구분하고, 각자의 이익을 보존하는 한 방식으로 기능하며 출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높은 수확이 담보된 사냥터에서 우리 부족의 일원이 양식(糧食)을 획득하는 것은 허가하지만 다른 부족의 수익 활동은 배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게도 동일 구성원의 수확물이라야 그 이익의 결과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대편의 이익보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모든 존재의 본능이 그러하기에 뭐라 비난할 수도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된다.

순혈주의의 극단은 정실인사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혈통을 공유하는 집단이 이익을 나누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 혈통 가운데서도 정실과 측실(側室)을 구분해 이익의 우선순위를 구분하는 경향을 말한다. 능력에 따른 공평한 분배는 누구에게도 불만을 갖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어느 누구도 분배를 판단하는 이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하지 않음도 의미한다. 반면에 차별적인 이익의 분배는 수여자와 계승자에게 특별한 결속을 부여하게 된다. 특별한 결속이란 바로 이익의 배타적 공유를 말한다.

역사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인간의 의식구조는 권력세습과 장자상속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집단, 특히 국가에서 지도자를 선출할 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유능한 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현 지도자의 자녀 중에서 택하는 방식이며, 그 자녀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자녀를 후계(後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실부인의 소생에서만 정하는 전통이다. 물론 각 역사 시기와 지역마다 약간의 예외는 존재하겠지만 이는 중세의 왕정주의를 지탱해온 기본 바탕이 되어 왔다. 요컨대 ‘왕대밭에 왕대가 자라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본능의 영역.
참 문명 세계에서는
개벽의 장애물일 뿐.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대로 인류의 인지가 고루 발달 되는 시기가 되면서 혈통이 능력을 담보하지 않음을 인식한 계몽된 근대적 국민국가의 구성원들은 이 같은 전통을 전복시켜 세습하지 않고 독점되지 않는 권력, 즉 민주주의와 공화제도를 탄생시켰다. 이처럼 종전에 ‘불합리한 차별제도’에 기초한 인류의 생활양식은, 상여 앞에 서서 ‘어이야 데이야’ 하는 개벽의 상두소리와 함께 점차 소멸해 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을 필두로 하는 세계 곳곳의 세습제 국가들은 세계인들의 조소와 따돌림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는 여전히 순혈주의와 정실인사 흔적들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다. 예컨대 불과 얼마 전까지도 군대나 경찰 조직에서는 특정 교육기관 출신을 우대했고, 일반 기업조직으로 가보면 이른바 명문대학을 나온 구성원들끼리 집단을 형성하며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종교계도 예외는 아니라 ‘누구 문하의 몇 대 제자’라는 족보에 이름을 올려야 그나마 법을 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 ‘밀어주고 끌어주는’ 정의(情義)의 순기능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술계와 종교계의 경우처럼 도제(徒弟)식 교육이라야 후계가 양성되는 분야에서는 스승의 능력이 제자의 능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팽배했던 순혈주의의 패악을 잊지 않아야 한다. 
특히 사고(思考)의 근친교배는 조직을 병들게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새로운 유전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집단은 반드시 멸종할 수밖에 없다.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는지, 우리도 돌아봐야 할 때다.

/김화교당

[2023년 1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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