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깨달음을 얻지 못해 영생을 죽네 사네 몸부림치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생사, 시비, 소유에 대한 것이다. 아프거나 죽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 네가 문제라는 시비, 모든 걸 내가 더 차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삶을 힘들게 하는 주된 요소다. 이 세 가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해법은 깨달음을 얻어 ‘생사 문제는 불생불멸, 시비는 불구부정, 소유의 박탈로 인한 것은 부증불감(不增不減)’임을 즉각 확인해 녹이는 것이다.

부증불감은, 진리 자리에서는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으니, 무엇이 줄거나 늘었다고 울고 웃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살라는 말씀이다. 누가 나보다 더 잘 나가고, 누가 나보다 더 많이 벌고, 나보다 더 좋은 차, 더 넓은 집, 더 많은 인기를 받으면 상대적으로 내가 작아진 것 같아 괜히 심란해진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고, 더 많은 돈, 더 많은 인기와 능력을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더 낮아지거나 가난해지거나 실패하거나 천대받기를 원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는 더 크고 좋은 것을 차지해 웃는 시간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뺏기거나 차지하지 못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 늘 일어난다. 이겨도 문제, 져도 문제다. 상대심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은, 남이 잘되면 질투로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내가 잘되면 자만심에 들떠 산다. 열등감이 강할수록 자만심도 강한 법이라, 이 둘은 금세 역전되니 괴로움은 끝이 없다. 진리를 몰라 상대심으로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하며, 중생들이 세상 살아가는 안쓰러운 양상이다.

일체 괴로움을 벗어나는 단 하나의 길은, 깨달음을 얻어 상대가 다 끊어진 진리 자리에 머물러 사는 것이다. 진리, 자성, 참나 자리에는 상대가 없으니 일체 괴로움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최면이나 가상현실처럼 억지스럽게 만든 설정에 빠져 괴로움을 잊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이것만이 정확한 사실이고 진리인데다, 가장 효과적이다.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자 참된 수행은, 오직 이 자리를 깨쳐 거기에 머무는 것이다.
 

둘 아닌 이 자리를 알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는 것,
일체 괴로움을
단번에 해결하는 묘법.

자성을 깨쳐 전체를 나로 삼는 자리에서는 마음에 괴로울 일이 없어, 언제나 여여한 극락이다. 일원의 체성에 합하면, 전체가 나 아님이 없어,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더 높아질 것도 더 낮아질 것도 없다. 온 우주가 나 하나로 가득하니, 저 사람도 나요, 저 물건도 허공도 일체가 다 나다. 저쪽에서 잘되는 일이 전체인 내가 잘 되는 일이라, 설령 내 것을 저쪽에서 가져간다고 상대적으로 작아지거나 괴로울 일이 없다. 이쪽에서 늘어난다고 널뛰지도 않으며, 저쪽에서 늘어난다고 위축되지 않고, 일체를 변화로 알고 여여히 살아간다.

나는 전체에 가득하니, 저쪽에서 땅을 산다고 이쪽에서 배 아플 일이 없다. 오히려 전체 한 몸인 내가 잘 된 것이라, 남 잘되는 것을 백 퍼센트 찬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해 주는 수희공덕(隨喜功德)이 가능해져 엄청난 복을 받게 된다.

법신불 자리에 머물면 너와 내가 한 몸이니, 오고 가는 것도 없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둘 아닌 이 자리를 알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는 것만이 일체 괴로움을 단번에 해결하는 묘법이며, 이것만이 참 수행이다. 불리자성, 즉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참 수행이라, 자성을 깨치지 않고 참 수행은 할 수 없다. 

자성을 깨치는 일, 영생 모든 괴로움의 해결이 오직 이 견성에서 출발한다. 하려고 원만 세우면 누구나 금방인데, 이 쉬운 걸 유보하는 이는 참으로 불행한 바보지 뭔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1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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