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엔진을 개조해 만든 발동기는 그야말로 ‘희귀품’이다.
버스 엔진을 개조해 만든 발동기는 그야말로 ‘희귀품’이다.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누군가 노래 가사로 지어 불렀다. ‘쌀 한 톨의 무게에는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이 스몄고, 농부의 새벽이 숨었고, 우주가 들었다’고.

들녘의 봄과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를 가득 품어 황금빛을 입은 벼 이삭이 새하얀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그래서 예삿일이 아니다. 땅과 하늘, 거기에 바람과 비와 햇볕이 힘을 모아 키워낸 결실. 그 덕에 제아무리 잘 자랐대도, 이들은 정미소에 도착해 자신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한 번 두 번 벗어야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유용한 존재가 된다.

신대정미소는 곡식이 제 역할을 찾아가는 여정에 110년간 함께해왔다. 국내에 몇 안 남은 재래식 정미시설로도 주목받는 이곳에는, 역사의 근 절반에 해당하는 세월 40여 년을 이어온 김희수 대표의 우직함이 함께 들었다.

‘진짜 주인’ 되기
그는 정미소집 아들이었다. 원래라고 하긴 그렇고,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화성시 팔탄면으로 이사한 부모님이 정미소를 시작했다. 그땐 생각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도왔던 경험이 정미소 독립 운영까지 이어지리라고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 작은 사업을 하다가 ‘정미소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돈을 빌려 평택으로 내려왔다. 도착해서 보니 사방이 평야였다. 그때의 그는 인근 벼의 도정이 모두 자신의 정미소에서 이뤄지는 줄 알고 ‘10년만 고생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구나’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달이 지나도 쌀을 빻아달라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정미소는 동네마다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전 주인이 일거리를 몽땅 당겨 해치우고 갔다는 것을. 평택으로 내려온 건 3월, 먹고 살아야 하니 그는 하루 일당 1만원짜리 다른 일을 하러 다녔다. 6개월이 흐르고 가을 추수가 시작되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짜 정미소 주인’이 됐다.

부모님 일을 거들며 정미소가 돌아가는 이론(?)은 알고 있었으니, 일은 큰 부딪침 없이 정착했다. 하지만 ‘대학까지 졸업하고 외지에서 들어와 정미소를 하는’ 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눈총은 감당이 쉽지 않았다. ‘남의 동네에 살려고 왔으면 술을 사라, 밥을 사라’는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환경이나 요구에 기죽거나 반발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샀다. 이는 정미소를 주로 찾는 부모님 세대와 코드를 맞추는 데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정미소 일감이 없어 다른 일을 하러 다닌 기간은 동네 사람들과 교감하며 친분을 쌓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신뢰 덕분에 그는 올해로 10년째 이장도 하고, 현재 안중농협 이사직도 맡고 있다.
 

솔직·정직·진실로 승부
정미소를 하며 얻은 가장 큰 보람을 묻자 그는 “신용”이라고 답했다. 전말을 나열하면 이렇다.

지금이야 택배 주문이 보편적이지만, 과거 택배 주문은 ‘알음알음’ 이뤄지는 게 다반사였다. 게다가 신대정미소는 특별한 인쇄물 홍보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그야말로 ‘입에서 입으로’ 소개받아 주문하는 형식이었다.

입소문의 비결은 그가 가진 솔직·정직·진실이 기반이다. 이야기 하나, 그는 자신이 가진 양이 100가마면 딱 100가마만 판매한다. 추가 주문량이 있는 경우 이웃 정미소에서 가져와 팔면 훨씬 이득이지만 그는 “보유량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내년에 좀 더 일찍 주문하라”고 당당히 설명한다. 벼를 심고 수확하는 때에 따라 맛이 다를 수밖에 없는 쌀을 ‘혼합’해본 적도 없다. 좋으면 좋은 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정직하게 판매하다 보니 ‘맛이 다르다’는 항의를 받은 게 부지기수다.

종종 속상한 일은 또 있다. 쌀을 보냈지만 돈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문제가 있다며 거의 다 먹은 쌀을 ‘착불’로 되돌려 받기도 하는 것. “그럴 땐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있는 건 상대방의 전화번호와 주소뿐인데, 전화한들 떼먹은 사람이 받겠어요? 연락이 안 되면 그냥 떼이고 마는 거죠. 그렇게 사는 거지 뭐.” 그의 마음 씀은 그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내 마음 같지 않구나’를 한 번 더 확인하는 데 그친다.
 

오랜 역사 그대로 담은 갖가지
역사만큼, 신대정미소에는 유물이라 칭할 법한 소재도 많다. 먼저 조각조각 덧대진 함석지붕이 그렇고, 오래된 나무 간판 역시 이곳만의 오래됨을 제대로 보여준다. 곡식을 퍼담는 기준이 됐던 ‘되’, 이물질을 걸러내거나 곡식을 크기별로 분류하는 ‘체’도 과거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뭐니 뭐니해도 신대정미소의 가장 큰 유물이자 보물은 재래식 정미시설 그 자체다. 소나무로 짜인 정미시설은 여전히 발을 딛고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고, 버스 엔진을 개조해 만든 발동기는 아마 이곳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토록 성성함에도 신대정미소 정미 기계는 2년여간 멈춘 상태다. ‘농협 임원은 농협 사업과 연계된 일을 할 수 없다’는 조항 때문이다. 이에 이곳에서 쌀을 빻던 이들 사이에는 당연히 난리가 일었다. 쌀농사를 계속 짓는 그도 요즘에는 이웃 정미소에서 쌀을 빻는다. “내가 내 쌀 빻는 걸 누가 뭐라 하겠어요. 하지만 내 쌀을 빻으면 다른 사람 쌀도 빻아줘야 해요. ‘우리끼리 비밀로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디 세상에 비밀이 있던가요? 안 해야 하는 일은 아예 안 하는 게 맞아요.”

오늘도 모락모락, 새하얀 쌀밥이 한 그릇 가득 담겨 밥상에 올랐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오늘 몇 알의 우주를 삼켜 ‘내 것’ 삼았을까. 쌀도 사람도 껍질에 싸인 채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할 터. 단계마다 겹겹을 잘 벗어낼 때, 참 우주를 이뤄낼 것이다.

[2023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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