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원 소장
이준원 소장

[원불교신문=이준원 소장] ‘나는 누구인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자리는 어디인가? 분별하고 시비하기 전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안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도 언어다.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는 선악도 고락도, 시비도 이해도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풍랑이 잔 바다, 달빛 완연한 호수와도 같다. 

깨침은 시비이해의 판단과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기 전 본연의 본성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의문이 풀린 것이다. 마음에 도장 찍듯 선명하게 각인된다. 심인(心印)이다. 스승과 제자 간에 심심상련·심심상인(心心相連·心心相印)이 된다. 이로부터 제자는 스승에 대한 도리를 행하기 시작한다.

천지와 부모는 하감지위(下鑑之位)다. 위에서 아래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시무처로 꿰뚫어 보며 거울처럼 훤히 보고(觀) 있다. 그래서 관세음(觀世音)이다. 천지와 부모가 없다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선악과 고락, 시비와 이해의 판단 대상이 아닌 ‘절대적’ 은(恩)의 관계다. 천지와 부모를 원망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자승자박이 된다. 

동포와 법률은 응감지위(應鑑之位)다. 같은 기운끼리 서로 구하고,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한다(同氣相求 同聲相應)한다. 시비이해에 따라 유유상종 무리를 짓는다. 좌와 우,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 진지전을 한다. 대의와 신의가 아닌 빙공영사(聘公營私)와 이해타산으로 모인 집단은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파당을 짓게 되면서 자체 분열한다. “대의는 여여하고 신의는 불멸이다.”

‘풍향계’ 원고를 마감하기 전 오해와 오류를 없애기 위해 출가와 재가 원로들에게 지도·감정을 받는다. 원고 마감 전 두세 번 새로 쓴다. 교단과 사회의 바람 부는 방향, 풍향을 봐야 하니 원고 마감일 전에는 밤을 새우기도 한다. 법연 맺은 지 반백 년 되어 가는 은사형(恩師兄)께서 보약을 보내주신다. 모두가 은혜요 감사다. 

변화와 혁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천지 같고 부모 같은 소태산의 제자 된 도리는 무엇인가? 서원은 나와 소태산과 맺은 심리적 계약이다. 변화는 나 자신의 변화, 혁신은 시대에 따라 나를 혁신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닌가? 이러한 물음에서 멀어질 때, 무리 지어 하는 변화와 혁신의 외침은 섭섭함과 피로감, 실망감과 상실감, 공허함만 남는다. 남이 알기 전에 자신이 먼저 안다.

/솔로몬연구소

[2023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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