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한국인치고 옆에서 누군가 라면을 먹고 있을 때, 한 젓가락 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종류도 많고 맛도 좋아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한국 라면의 맛, 몸에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끊기란 쉽지 않다.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라면처럼,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또 다른 라면이 있다. 그건 바로 ‘~했더라면’으로 이어지는 ‘생각라면’이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지금 성공해서 잘 살고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그 땅을 샀더라면, 거기 가지 않았더라면,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루에도 수없이 크고 작은 생각라면 끓이느라 우리의 정신은 퍽 고되다. 과거 잘못된 일을 떠올리며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생각라면은, 스스로를 자책과 죄의식에 빠뜨려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다. 

내가 가자고 해서 간 여행에서 일행 중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나 때문인 것 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괜히 혼자 힘들어한다. 그때 그곳을 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불행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맥락도 없는 인과를 갖다 붙여 스스로를 괴롭힌다. 혹은 반대로, 상대방이 하자고 해 문제가 생겼다면, 그 라면을 상대방에게 덧씌워 그를 탓하며 죄인으로 만든다. 

과연 이 생각은 사실인가? 단언컨대 ‘아니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반드시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는, 소위 법정 용어로 ‘그렇다는 증거가 있는가?’ ‘없다!’ 
 

일어난 모든 일은
더 나은 것
 더 나쁜 게
따로 없다.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진리의 작용이다.

가정법으로 구성되는 생각라면은 감히 신의 영역에 개입하려는 오만함일 뿐, 아무 근거 없는 허구다. 꼼짝 않고 집에만 있었더라도 일어날 일은 진리에 의해 다 일어난다. 아무리 용한 부적을 써 베개 속에 넣고 자도, 인연과로 돌아오는 진리의 일은 결코 막을 수 없다. 

일어날 일만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그대가 어떻게 했더라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의 일은 낙엽 하나, 눈송이 하나조차 정확히 떨어질 자리에 떨어진다. 진리는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그대가 어찌한다고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부질없고 치명적인 생각라면을 끊고, 강물에 나무토막 떠내려가듯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살면 된다.

진리는 일어날 조건이 순숙 되면 그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 내가, 혹은 상대방이 어떻게 했는가와는 무관하게, 그 일은 일어날 일이었음을 즉시 알아차리고 맘고생을 멈추는 이가 현명하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그의 문제며, 내게 일어난 일은 나의 문제일 뿐, 누가 이러고 저러고 한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일어난 모든 일은 또한 더 나은 것, 더 나쁜 것이 없이,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진리의 작용이다. 분별심과 상대심만 놓으면, 지금 일어나는 일은 다 온전하며, 지금 수용하는 모든 것은 아무 문제 없이 충분하다.

자성을 떠나지 않고 육근을 동작하면 생각라면 끓일 일이 없어 괴로움이 사라진다. 어떤 일만 일어나기를,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간택하는 분별심이 주범이며, 감히 진리와 흥정하려는 우매하고 불행한 태도다. 지혜롭고 힘 있는 이는 진리의 일에 간섭하려 들지 않으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일이었구나 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며 산다. 

생각라면 끓여 자책과 탓으로 허송세월하면서 가당치도 않게 진리의 일에 월권행위 하려 말고, 다 내맡기고 평안하게 오직 이 순간을 살 일이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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