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5년(1920), 변산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제정하다

교법을 제정한 봉래정사 시절 시봉진의 실경, 원기13년(1928) 익산총부에서 촬영
교법을 제정한 봉래정사 시절 시봉진의 실경, 원기13년(1928) 익산총부에서 촬영

소태산 대종사가 월명암에 머물자, 전주와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宋赤壁), 김남천(金南天) 등이 찾아와 모시기를 원했다.

원기4(1919) 음력 12, 소태산 대종사가 월명암에서 산 아래인 실상사 옆 실상초당으로 거처를 옮기자 김남천과 송적벽이 시봉(侍奉)을 하고, 김남천은 홀로 된 딸 김혜월(金慧月)과 외손녀 이청풍(李淸風)을 초당으로 오도록 해 식사 수발 등의 시봉을 담당하게 했다. 이때 영광·김제·전주 등지의 신자들이 서로 소식을 통해 찾아오자 소태산 대종사는 그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방법의 법문을 설했다.

원기5(1920) 음력 3, 소태산 대종사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장편 가사(歌辭), 음력 4월에는 새 회상의 기본 교리 교강인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를 발표했다. 또한 밖으로 여러 승려들과 교제하며 재래 사원의 법도를 청취해 불교를 시대에 맞도록 하여 대중을 교화하자는 <조선불교혁신론>과 전문 수양 방법과 각 항 연구 조목을 지정한 <수양연구요론>을 초안했다.

새 회상의 두 교서는 익산총부 건설 후 발간돼 상당한 기간 동안 초기교서의 일부로 사용됐다. 현재는 변산원광선원에서 실상초당이 있었던 옛터 옆에 와가(瓦家)를 짓고 봉래정사(蓬萊精舍)’라는 현판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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