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5년(1920), 변산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제정하다
소태산 대종사가 월명암에 머물자, 전주와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宋赤壁), 김남천(金南天) 등이 찾아와 모시기를 원했다.
원기4년(1919) 음력 12월, 소태산 대종사가 월명암에서 산 아래인 실상사 옆 실상초당으로 거처를 옮기자 김남천과 송적벽이 시봉(侍奉)을 하고, 김남천은 홀로 된 딸 김혜월(金慧月)과 외손녀 이청풍(李淸風)을 초당으로 오도록 해 식사 수발 등의 시봉을 담당하게 했다. 이때 영광·김제·전주 등지의 신자들이 서로 소식을 통해 찾아오자 소태산 대종사는 그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방법의 법문을 설했다.
원기5년(1920) 음력 3월, 소태산 대종사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장편 가사(歌辭)를, 음력 4월에는 새 회상의 기본 교리 교강인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를 발표했다. 또한 밖으로 여러 승려들과 교제하며 재래 사원의 법도를 청취해 불교를 시대에 맞도록 하여 대중을 교화하자는 <조선불교혁신론>과 전문 수양 방법과 각 항 연구 조목을 지정한 <수양연구요론>을 초안했다.
새 회상의 두 교서는 익산총부 건설 후 발간돼 상당한 기간 동안 초기교서의 일부로 사용됐다. 현재는 변산원광선원에서 실상초당이 있었던 옛터 옆에 와가(瓦家)를 짓고 ‘봉래정사(蓬萊精舍)’라는 현판을 달았다.
원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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