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어떤 삶은 하나의 자세로 기억된다. 언제 봐도 늘 그 모습, 그 일을 할 때 제일 빛나고 아름답다. 컴퓨터 앞에서 신문이며 회보를 만들고, 지면으로 인쇄해 몇 번이고 들여다보는 모습, 유인숙 디자이너(천안교당)의 보은은 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이뤄진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져야겠어!”라며 편집디자인에 뛰어든 건 스물여섯 살이었다. 오래 앉아 길게 들여다보는 일, 내 손으로 뭔가가 완성되고 나면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하지만 보람만큼이나 ‘출판1번지’ 충무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분명 해달라는 대로 했는데 ‘그 느낌 아니다’, ‘약간 더 있어보이면서 겸손하게(?) 해달라’와 같은 애매한 요청들이 많았다. 주로 회사 사보나 대형학원 전단지를 디자인했는데, 몇 날 며칠을 시달리기도 하고 다 된 걸 엎기도 했다. 다 나온 팸플릿 한 장 한  장에 추가 문구 한 줄 한 줄을 오려붙이며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다.

“힘들 때면, 달력을 보며 교당 가는 날까지 며칠 남았나 세어봤어요. 그때 는 일요일 외에 수요일, 토요일에도 갔었거든요. 충무로에서 교당가는 40분 내내 너무 행복하고 설렜죠.”

그 많던 경계들을 버스에 두고 내린 듯, 교당 앞에만 서면 마음이 가뿐해졌다. 일할 때는 집중하느라 인상을 썼는데, 교당에서는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 됐다. 서른 살 넘어 엄마 따라 교당에 나온 막내딸, 유 교도는 그렇게 ‘교당의 딸’이 됐다.
 

〈한울안신문〉 22년, 교당 회보 25년째 편집․디자인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신심으로 3대 가족교화 
부회장․총무기획분과장 맡아 교당의 주인 역할

‘엄마’는 닮고 싶은 신앙인
“연원도, 존경하는 분도, 닮고 싶은 신앙인도 다 엄마예요. 엄마 덕분에 입교했고, 교당에도 나갔죠. 제가 거의 평생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아흔 살된 엄마가 여전히 건강하고 정갈하게 신앙생활 하시니 너무 감사하죠.”

2남 4녀 중 막내딸인 그는 오래 엄마(이청옥 교도) 곁에 있었고, 결혼하며 천안으로 가서도 2년만에 엄마를 모셔갔다. 갓 태어난 딸 태희를 봐달라는 요청이었는데, 그 딸이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함께 산다. 그에게 엄마는 누구보다 오래 함께 산 동거인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이며, 또한 그를 늘 일깨워주는 도반이다.

“제가 어릴 때 원불교에 온 엄마는, 그땐 한글도 잘 모르셨는데 2주만에 일원상 서원문이며 독경을 다 외우셨어요. 아침이든 저녁이든 늘 목욕 후에 기도복까지 입고 심고 올리고, 산책하면서도 염불 독경을 하세요. 엄마의 기도가 늘 집에 은은하게 배어있죠.”

온통 ‘신앙’인 엄마의 삶이 20대 때는 싫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는 엄마가 그랬다. “6남매 모두를 입교는 시켰는데, 커서 교당 나오는 자식 하나가 없다.” 마음 아팠던 딸은 답했다. “엄마, 내가 같이 갈게.” 그렇게 나온 원불교에 단박에 빠진 유 교도, 마치 엄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회보와 신문은 인생 최고의 선택
“교당 다니면서 보니 교무님들 업무가 많더라고요. 자연스레 하나둘 교당 일을 찾아 했어요. 당시 신자연 교무님이 동갑내기인 저와 박혜현 교도를 잘 써주셨지요.”

헌공금도 계산하고, 문서도 만들었지만, 역시 그의 실력이 제대로 나온 건 교당 회보였다. 전문인의 손이 닿으니 금세 보기 좋아졌고, 교도들은 회보를 아껴 집에도 가져가고 안 나온 교도들에게도 보냈다. 그러다 알게 된 소식, 서울교구에서 <한울안신문> 디자이너를 구한다고 했다. 

“늘 더 보은하고 싶었는데 이게 길이다 싶었어요. 두 마음 없이 지원했고, 충무로 일을 줄여가며 신문사에 나갔습니다. 돌아보면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죠.”

서울교구과 경기인천교구를 비롯한 곳곳에서 교도들이 즐겨보고, 잠자는 교도나 비교도에게는 안부이자 교화 재료로 쓰이는 <한울안신문>. 그 자리를 지킨 세월이 22년째로, 그간 5명의 발행인(교구장)과 6명의 편집장이 그와 손을 맞췄더랬다. 결혼하면서 천안으로 이주했지만, 지금도 그는 매주 왕복 서너시간을 들여 이곳으로 출근한다.
 

유인숙 디자이너가 만든 천안교당 회보.
유인숙 디자이너가 만든 천안교당 회보.

 

교무님이 설법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엄마부터 딸, 손녀에까지 대물림되는 신심. 덕분에 그의 남편도 자연스레 교도가 됐다. 결혼 직후에는 어색해했던 남편(이도명 교도)은, 함께 사는 장모님의 한결같은 신성에 감화됐다. 법회며 훈련에 빠지지 않는 든든한 남편 덕에, 그는 교당 부회장에 총무기획분과장까지 맡아 한다.

“회보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자며 공양, 감상담, 공고까지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가끔은 제가 빈 곳을 채워야할 때도 있죠. 감상담도 여러번 썼고, 펑크난 사회자 역할을 하다 보니 이제는 실력도 늘었어요. 소위 ‘땜빵공부’죠.”

분과 체제가 잘 움직여 교도가 주인된 천안교당. 교무님이 설법에만 집중할 수 있게 최대한 교당 일을 맡는 게 그의 바람이다. 회보는 물론 여타의 디자인, 문서관리, 회의록까지도 다 챙기니, 김인창 교무는 그를 두고 “교무 이상의 역할을 해주니 모두들 믿고 의지하는 든든한 주인”이라고 표현한다. 

“원불교 덕분에 이렇게 일원가정을 이뤄 잘 살고 있어요. 아직도 갚을 게 많으니 뭐 하나 놓을 수가 없네요.” 

법회나 선방이 없는 날에는 신문과 회보를 만들며 매일을 원불교로 채우는 유인숙 교도의 삶. 흰 바탕에 글이며 그림을 앉혀 완성하는 편집디자인이라는 일처럼, 그의 오롯하고 정성스런  보은은 그의 신앙을 크게 채운다.

[2023년 12월 6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