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기성정치인이 방송에서 한 말이 회자되었다.

“(정치에서 혁신이란 게) 본래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려가고, 마지막엔 쥐꼬리로 실천하게 된다.”

야당 정치인인 그가 집권당의 혁신위에 쏟아낸 말이지만 야당 역시 혁신의 실패를 본 일이 있기에 자성의 말로도 들린다. 사실 정치에 있어 혁신은 권력을 정점으로 한 시소게임에 지나지 않기에 이합집산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기에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혁신이고 그걸 꼬투리로 권력의 피비린내가 반복되어 왔다.

그에 비해 종교의 혁신은 사뭇 무게감이 다르다. 1947년 성철 스님을 중심으로 결행한 ‘봉암사 결사’는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대전환의 불씨가 되어 오늘날 불교의 기풍을 새롭게 하는 혁신의 디딤돌이 되었다. 또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와 개혁을 이룬 대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도 가톨릭은 이에 바탕, 끊임없이 자기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익히 알다시피,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을 강조함으로써 권력 중심의 기독교를 일대 혁신하는 기점이 되었다.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의 혁신은 기성 종교와 달리 ‘사람의 삶’에 맞춰진 것이 특징이다. 종교를 위한 종교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삶에 종교를 맞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원불교의 혁신은 이에 바탕 할 때 성공을 기약할 수 있고, 늘 또 다시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에 서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체로 정치와 종교의 혁신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정치의 혁신이 나(혹은 우리)를 중심으로 한 권력 지향에 목적을 둔 반면, 종교의 혁신은 나보다는 너를 중심으로 하고 자기희생을 통한 인류행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치 혁신이 거짓과 모략으로 늘 시끄럽다면 종교 혁신은 스스로 낮아지는 시간을 견디며 화합과 단결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는 종교인이 정치인을 바로 잡아주는 스승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종교가 마저 혁신이 쉽지 않은 이유는 가끔 종교에 정치가 끼어들어 본질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의 문제를 정치로 풀려 할 때 어김없이 사단이 생긴다. 이는 법난이란 문제로 사회를 걱정하게 만든 이웃 종교의 사례가 반면교사다. 이처럼 정치하는 종교인만큼 허망한 일도 없는데, 이를 소태산은 낮도깨비로 표현했다. 

‘… 사술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와,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라고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정신 차린 종교인이 필요하다. 속지 말자.

[2023년 1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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