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영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원불교를 만나고 ‘자부심’이 됐다. 영광군 백수읍, 소태산 대종사가 태어나 대각한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한 소년은 고등학교 때 처음 ‘자부심’을 배웠다. “고등학교 때 상담실에서 원불교 교무님을 처음 봤어요. 당시 노래도 잘하고 기품있던 교무님을 보니 동경이 생기더라고요.” 김영근 목동교당 교도회장은 당시 해룡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김정심 교무에게서 꿈과 서원을 배웠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뭐든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 하지만 그에 비해 가정형편은 녹록지 않았다. 하루는 형이 “원불교에 가면 원없이 공부할 수 있다더라”고 했다. 그 길로 교무님을 찾아갔고 “공부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무님은 그를 부산 동래교당으로 보냈다. 태어나면서부터 벗어나본 적 없는 영광을 떠나 부산 유학을 가게 됐다. 하지만 낯설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처음 가본 교당이었지만 꼭 내 집 같고 편안했어요.”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 그는 당시 동래교당 교무였던 故 김대관 종사를 도와 연탄도 갈고 교당 일도 도우며 공부에 열중했다. “그렇게 공부하며 살았던 시간은 제 마음 속에 ‘만나는 이마다 이 같은 은혜를 베풀어야지’라는 다짐으로 깊어졌어요.” 

지금도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교도회장’이다.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며 여러 교당들이 많이 위축됐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교당 교도 한 명, 한 명에게 일심을 하려고 노력했다. “혼자의 힘은 부족해도 같이하면 뭐든 배가되는 위력을, 저는 원불교에서 배웠거든요.” 김 교도회장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화두는 목동교당이 ‘누구나 올 수 있는 교당’이 되는 것이다. “교무님 도와서 우리의 울을 넓혀가는 게 교화잖아요.” 

물론 그도 이 공부가 힘에 부칠 때가 있었다. 코로나19에 감염된 후 면역력이 바닥난 몸이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오죽하면 길을 가다 무심코 나온 재채기에 몸이 고꾸라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비대면 법회를 보며 공부심이 나태해졌다. 그때 원불교에서 만난 여러 인연과 스승들은 “공부인은 선과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한다”며 그를 잡아줬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라는 마음으로 일상수행의 요법을 공부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나는 너희들이 성불하기를 바란다’고 직접 쓰셨다는데, 그 목표를 품고 공부하려고 합니다.” 사반공배를 유념하는 교도회장, 6070세대에게는 아들같고 4050세대에게는 친구같으며 2030세대에게는 어른같은 그에게 원불교는 ‘닳지 않는 연필’이자 ‘마지막 장이 나오지 않는 공책’처럼 늘 새 것 같은 공부거리다.

[2023년 1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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