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어떤 상황이나 사람의 언행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 흔히 ‘아주 언어도단이야’ 하는 표현을 쓴다. 언어도단이란 원래, 이렇게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는 상황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은 진리를 표현하려 할 때, 한없이 깊고 광대하고 형체도 없이 텅 비어 있으니, 어떤 말과 글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는 의미로 탄생했다. 형언할 수 없이 고귀한 용어가 어쩌다 평판이 좋지 않게 막 쓰이는 딱한 처지로 전락했는지 모르겠다.

말과 글과 생각으로는 우리는 풀 한 포기조차 설명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사람들은 뭔가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곧장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얻어서 그것에 대해 다 아는 척을 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모양과 이름 정도, 혹 더 나아간다 해도 그 특성과 생태, 용도, 식용 유무 등 인간이 멋대로 갖다 붙인 것일 뿐, 그 자체는 결코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언어학자, 모든 사람들의 언어를 다 동원해도, 세상 모든 화가들을 동원해 그림과 형상으로 표현해도 돌멩이 하나도 그 자체는 다 표현될 수 없다. 그 어떤 표현도 단지 표현일 뿐, 그 자체는 아니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며,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설령 가장 잘 안다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어울려 지낸 죽마고우라도, 그 사람 자체는 결코 알 수 없다. 안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은 단지 묘사나 느낌이나 지식이지 오묘한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어떤 앎이나 정보로도 그 자체는 결코 묘사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신비다. 
 

진공으로 체를 삼아
온 우주가 나 하나로 가득해
일체 상대가 끊어진 경지가
바로 정

일체만물은 무엇이든 결코 알 수 없다. 언어명상으로 그 자체에 이를 수 없다. 존재 자체는 결코 알 수 없어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 하며, 머리로 이해하거나 분별로 알 수 없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한다. 일체 만물은 언어로 그 자체에 도달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오묘하고 알 수 없는 신이며 진리다. 

형상 있는 것도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는데, 하물며 형상도 없는 텅 빈 허공을 그 어떤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눈앞 텅 빈 허공을 말이나 글로 한번 표현해 보면, 왜 언어도단인지 바로 알 것이다. 그 텅 빈 진리에 대한 성자들의 말씀이 곧 경전인데, 경전 또한 언어일 뿐, 텅 빈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텅 빈 허공, 신, 성품, 일원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관조로써 깨달아 도달하는 길밖에 없다. 진리는 언어도단이다. 

입정처(入定處)는 움직이지 않는 자리, 곧 본성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움직이지 않음을 정(定)이라 한다. 육근으로 나를 삼았던 내가 사라지고, 우주 가득한 텅 빈 전지전능자, 일원의 체성에 합한 상태가 입정처다. 진공으로 체를 삼아 온 우주가 나 하나로 가득하여, 일체 상대가 끊어진 경지가 바로 정이다. 더 나아갈 곳 없이 전체에 가득하니 움직일 수 없다. 성품의 체는 움직임이 없으니 정이다. 오온이나 육근으로 나를 삼은 그 내가 사라지고, 오직 천하에 성품인 나밖에 없다. 그 움직임 없는 자성에 든 상태를 입정처라 한다. 

진리, 일원, 성품은 언어도단한 입정처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 자리, 텅 빈 그 입정처에 머물면 온 천하에 나밖에 없다. 고통을 줄 상대도 고통을 받을 나도 따로 없어 이미 해탈이다. 이 자리를 깨닫는 것이 영생의 일체 고통을 벗어나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길이다. 지식이나 이해나 체험으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가 바로 언어도단의 입정처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1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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