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6년(1921), 봉래정사 석두암을 신축하다

제자들과 신축한 변산 봉래정사 석두암, 원기28년(1943) 촬영
제자들과 신축한 변산 봉래정사 석두암, 원기28년(1943) 촬영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 실상초당에서 제자들과 생활을 시작하자 찾아오는 이는 갈수록 많아졌다. 원기6(1921), 월명암 백학명 선사의 주선으로 실상사 소유의 터 위에 송적벽이 터를 다졌고, 김남천이 목수 일을 맡아 초당을 짓고 석두암(石頭庵)’이라 이름 붙였다.

석두암이 완공되자 실상초당은 여자 제자들이, 석두암 윗방은 소태산 대종사가, 아랫방은 남자 제자들이 사용했다. 제자들은 소태산 대종사가 석두암에서 초안한 교강과 교서로 훈련하면서 정법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졌다.

원기8(1923) 초여름, 김제(金堤)에 사는 서중안(徐中安)은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뵙고 감복해 10세나 손아래인 소태산 대종사를 영부(靈父)로 모시기를 원해 부자지의(父子之義)의 결연을 했다. 이후 서중안이 부인 정세월(鄭世月)과 함께 찾아와서 이곳은 길이 험난해 교통이 불편하고 장소가 협착하니,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해 모든 사람의 앞길을 열어 주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고 하며, 하산(下山)을 지성으로 간청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를 허락했고, 회상의 문을 열 준비를 시작했다. 교단은 원기65(1980) 교강 반포 60주년을 기념해 석두암 터 자연석에 교전 형상의 일원대도一圓大道비를 세웠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