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온 삭신이 쑤시고 아프면 우리는 신음소리를 내며 힘들다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몸의 통증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믿고 사는데 그게 사실일까? 

30년 전쯤, 도반들과 함께 처음으로 스키를 타던 날, 넘어지고 뒤집어지며 몸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다들 행복해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려는데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사방에서 곡소리가 난무했다. 그런데도 이 상황을 불행하다거나 고통으로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남들 아파하는 모습에 깔깔거리며 좋아한다. 이 통증은 신나는 체험으로 인한 것이니, 좋은 일이라고 이름 붙인 후, 일어날 수도 없이 아픈데도 다들 웃는다. 

어떤 통증은 멋진 것, 어떤 통증은 불행이라고 스스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통증 자체는 행복도 불행도 아닌 중립인데, 스스로 붙이는 이름표 따라 행불행을 선택하며 산다는 증거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상황도, 나 스스로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 한,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시험에 떨어졌든, 버림받았든, 일어난 일 자체가 고통이거나 행복이 아니라 꼭 반전이 있단 뜻이니, 울고불고 몸부림칠 필요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어도, 그것 자체로는 한 사람의 고락을 좌우할 아무 힘이 없다. 

밤과 낮, 비나 햇빛, 겨울과 여름은, 어떤 것이 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존재를 키우는 자양분들일 뿐이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도, 불행이라고 이름 붙이는 생각 노동만 멈추면, 아무 문제 없는, 내 삶에 꼭 필요한 자양분들이며, 모두 진리의 작용이다. 

마음에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한 보따리씩 이름표를 들고 다니며, 이것은 좋은 것, 저것은 나쁜 것이라고 이름표 붙이는 수고를,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불행한 일이라고 재빨리 이름 붙이고는 ‘힘들어 죽겠다’며 목 놓아 운다. 어떤 극소수의 일에는 좋은 일이라고 이름 붙여 놓고, 실실거리며 붕 떠 지낸다.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규정된 행복이나
불행 같은 건 없다.

내게 오는 일체의 현상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중립이라는 사실을 직관해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시인 김춘수가 읊었듯, 그것을 꽃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으면 그냥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일체 일은 애초 이름 없는, 알 수 없는 진리 작용일 뿐이다. 

일단 판단을 멈춰서 보면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다. 좋고 나쁘다는 것도, 그로 인해 따라오는 감정까지도 스스로 선택함을 알아, 일단 판단중지를 해야 한다. 좀 유식한 서양철학 용어로 이런 판단중지를 ‘에포케’라 한다. 어떤 일에 불행이란 이름표를 붙이고는, 부정적인 감정이 막 따라 일어나려 할 때, 일단 판단중지하고 중립상태에 놓을 줄 아는 힘이 지혜이며 수행력이다. 

남이 내게 하는 어떤 말이나 글이나 행동도 일단 판단 중지해서, 그 음성이나 글씨나 몸짓을 낱낱이 해체해보면, 그것은 나를 괴롭게 할 아무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글자 하나, 표정 하나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갖지 못하도록, 멈춰 해체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 편히 잘 지낼 수 있다.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규정된 행복이나 불행 같은 건 없다. 힘 있는 이는 큰일도 해체하여 가벼이 처리할 줄 알고, 힘없는 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도 크게 만들어 야단을 떤다. 

지혜로운 이는 일체를 진리의 묘용으로 여기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성을 떠나지 않아, 늘 해탈의 경지에 머물 줄 안다. 오늘 하루 그대는, 얼마나 많은 이름표를 붙이며 살았는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12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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