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균(광일)
윤덕균(광일)

일원 76상(원형 성곽 상): 만리장성이 외침(外侵)에 취약한 이유는?
인류의 문화유산 중 최고봉을 꼽을 때‘달에서도 관측된다’는 만리장성을 꼽는 것을 주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리장성은 서쪽 자위관으로부터 동쪽 호산장성에 이르기까지 전장은 8,851.8㎞이며, 이중 인공성벽의 길이는 6,259.6㎞이고, 성벽의 평균 높이는 6~7m, 폭은 4~5m에 이르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도 손꼽힌다. 

진시황은 북의 흉노를 몰아내고 하투를 점령하며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는 만여 리의 장성을 수축했고, 수문제는 돌궐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수축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으로는 몽고의 칭기즈칸을 막지 못했고, 청나라의 누루하치도 만리장성을 넘었으며, 고구려의 연개소문도 만리장성을 넘었다. 이유는 일(一)자로 만들어진 성의 취약성에 있다. 성곽의 길이가 만리나 되다 보니 어딘가에는 취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일자로 늘어져 있으므로 보급이 원활치 못하고, 불평을 가진 성곽 수비군의 배반을 막기도 어렵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1/1000에도 못 미치는 고구려의 안시성은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맞아 철통의 요새를 지킬 수 있었다. 그 비결은 일자 성곽과 원형 성곽의 차이에 있다. 안시성 같은 원형 성곽은 일원상 진리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취약점을 없앨 수 있을 뿐 아니라 취약점이 노출되더라도 바로 보완이 가능하다. 

전쟁에서 공격군은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며, 결국 강점이 있는 군대가 승리한다. 그러나 방어군은 강점보다는 약점이 없어야 한다. 한국 대부분의 성곽이 일원상의 원형 성곽 모양을 갖는 이유는 ‘공격’보다는 ‘방어’가 주 임무였기 때문이다. 
 

 

계룡대의 8각형 건축물 보면, 불법연구회의 8괘기 연상.
신도안과 원불교의 인연 끝나지 않았음이 확인.

일원 77상(계룡대 상): 계룡대가 8각형인 이유는?
육해공군 본부가 자리하고 있는 계룡대는 왜 8각형 건물구조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구구하다. 미국의 국방부 건물이 펜타곤(5각형)인 것에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는 추론에서부터 한국의 8각정을 모방한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이에 대해 원불교 교도로서 말해보면, ‘계룡대는 불종불박의 땅’이기 때문이다. 원불교 초기 교단인 불법연구회의 8괘기도 연상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우면서 도읍을 옮기고자 당시 왕사로 모시던 무학대사와 중신들을 데리고 계룡산을 찾는다. 계룡산은 정감록에도 언급된 8승지의 으뜸으로 명산이며 길지이고 명당인지라 도성과 궁궐 건설 착수에 들어가게 됐으나, 공사 착수 10개월 만에 다시 멈추게 되면서 신도안이라는 지명만 남게 되었다. 

신도안과 원불교의 인연은 각별하다. 원기21년(1936) 신도안을 방문한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은 천여래 만보살이 날 곳이다”라며 “수양 도량을 만들라”고 당부했다. 당시 신도안에는 불종불박(佛宗佛朴), ‘불교가 종교의 중심이 되고 종주는 박씨가 된다’는 의미로 언제 누가 써놓았는지 알 수 없는 비기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문구를 보고 “무학대사가 장난을 쳤구만”이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원불교가 최초로 신도안을 매입한 것은 원기43년(1948) 정산종사에 의해서다. 이후 대산종사의 혈성으로 신도안에 5만7천여 평의 삼동원이 건설됐다. 

서울지역에 있던 육해공군 본부가 신도안 지역으로 이전한 것은 휴전선에서 일정 거리가 유지돼야 한다는 전략적 의미에 더해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실천한 사례다. 그러나 이에 원불교는 벼락을 맞게 됐다. 1983년(원기68), 정부에 의해 삼동원이 계룡대로 수용된 것이다. 당시 삼동원은 수용 조건으로 군부가 철수할 때 최우선 순위로 원불교에 반환할 것을 계약서에 명기했다. 

계룡대의 8각형 건축물을 보면, 불법연구회의 8괘기가 연상되고, 신도안과 원불교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미래 원불교 총부를 연상하며 반환 시점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함을 자각한다.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중곡교당

[2023년 12월 20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