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어릴 적, 겨울이면 엄마는 두툼한 솜을 꺼내 이불 홑청을 직접 갈아 끼웠다. 그때 이불의 바닥면부터 겉면 사방까지는 빳빳한 면(棉)이 둘러쌌고, 이불 겉면 가운데에는 꼭 부드럽고 화사한 비단이 놓였다. 얼핏 떠올려도 분홍, 노랑, 초록… 예뻤다. 그 예쁜 비단이 엄마의 손바느질을 따라 면과 서로 단단히 엮이면 이내 솜이불이 됐다. 보송하고 묵직한 새 이불 아래로 몸을 쏙 집어넣으면 따뜻한 겨울을 보장받은 듯, 포근했다.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 하나 더.
그날 엄마는 한복을 해 입으러 간다고 했다. 한복을 해 입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따라나선 걸음이 도착한 곳은 별천지였다. 눈을 돌리는 데마다 알록달록 예쁜 색과 무늬의 옷감 다발이 가득 쌓여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한두 가지만 고르지?’ 싶었다. 그날 엄마는 가게 아주머니가 어깨에 얹어가며 보여준 여러 한복 옷감 중 붓꽃이 그려진 톤 다운된 노란빛을 골라 위아래 같은 색으로 한복을 해 입었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불 홑청을 갈려면, 한복을 해 입으려면 ‘천을 떼’는 일이 가장 먼저 이뤄져야 했다. 그런 가게들을 일컬어 ‘포목점’ 또는 ‘주단’이라 칭한다는 걸, 어른이 되고 나서 알았다.
 

1920년대 시작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교 주단포목점
익산 인화동 한복거리에서만 90년 역사… 3대(代)째 이어
“신용이 최고. 10원 더 비싸도, 좋은 물건 사다 팔아라” 원칙

자연스럽게 이어진 3대(代) 100년
‘이 이야기는 곧 이 지역의 역사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말 우연히 알게 됐다. 익산에 100년 역사를 가진 포목점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곳의 이야기를 꼭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내년으로 총부 건설 100주년을 맞는 원불교와 함께 익산의 한 세기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성동(裕盛東)주단포목점(이하 유성동)의 역사는 현재 인화동 한복거리라 불리는 이곳에서만 꼬박 90년이다. 긴 역사만큼 특이한 또 한 가지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교 주단포목점이라는 것. 중국 산둥성 푸산현 출신인 할아버지(추립곤)가 친구를 따라 한국에 들어와 옷감 장사를 시작한 1920년대부터 계산하면, 유성동 역사는 얼추 따져도 그냥 100년이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살다가 18살 때 한번 할아버지 가게에 다녀갔다. 이후 중국 대련의 큰 가게에 들어가 비단장사를 정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24살이 되던 해, 익산으로 이주해 할아버지와 함께 유성동을 운영했다.추적민 대표와 류국아 여사는 1974년 결혼해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포목점 일을 배웠고, 물 흐르듯 ‘이 장사는 내가 해야겠구나’ 받아들였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게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유성동 역사는 3대로 이어졌다. 지금이야 부부 단둘이 가게를 지키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종업원을 10명 이상 두고도 명절 때는 온 가족이 동원돼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말보다 ‘오고 또 오는’ 행동으로
다후다(안감 원단), 광목, 뽀쁘링(포플린), 개성 베… 당시 유성동에서 팔 물건을 떼러 다니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다 보니, 부부는 주로 가게를 지켰다. 류 여사가 손님을 응대하고 물건값을 매기면 추 대표는 계산을 담당했다. 말하자면 부부는 50년간 같은 공간에서 늘 함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부부는 여러 변화도 항상 함께 맞았다.

당장 한복만 해도 유행이 계속 변했다. 위아래 같은 색으로 입던 데에서 위는 연하게 아래는 진하게 맞춰 입는 것으로, 이제는 위는 진하게 아래는 연하게 입는 게 유행이다. 처음 이 골목에 네다섯 개뿐이던 포목점은 종업원들이 독립하면서 늘어나 포목 거리를 만들었고, 여러 시간을 거쳐 오늘날 20여 개가 남아 한복거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행과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유성동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원칙이 한 가지 있다. 다름 아닌 ‘신용’이다. 이는 아버지가 가장 강조한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신용이 최고다. 무조건 좋은 물건으로 갖다 팔아라. 조금 싸다고 싼 물건 사다 팔지 말고, 10원 더 비싸도 10원 더 비싼 것을 사다 팔아라.” 그뿐인가, 어머니는 늘 직접 빚은 만두를 쪄 내주곤 했다. 이러한 마음을 손님들이 알지 못할 리 없다. 

“손님들이 한 말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류 여사로부터 “없어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의아해하려는 찰나, 한두 마디가 바로 덧붙는다. “다 단골손님이거든요. 좋으면 또 오고 안 좋으면 그냥 딴 데로 가는 거지, 굳이 다른 말 할 필요 있나요. 다만, 우리 가게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이미 와 있는 손님에게 ‘이 집 물건 좋아요?’ 물으면 ‘아이고, 얼마나 신용 있는 집이라고. 물건이 참 좋아요. 사 봐요’ 해줬죠.” 류 여사는 ‘좋고 싫고’ 하는 말보다 ‘오고 또 오는’ 행동으로 신뢰를 보여준 손님들의 얼굴을 떠올린 듯했다.
 

유성동만의 역사가 아니다
한때 유성동에는 왕궁, 금마, 삼례는 물론이고 정읍이나 부안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침 7시 전부터 손님이 찾아와 저녁 9시가 넘어야 가게를 닫을 수 있던 시절. 그렇게 바쁘다 보니, 아버지와 아들 부부가 살가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류 여사에게 시아버지는 ‘아주 좋은 분’으로 기억된다. 물건을 떼러 갈 때 아버지는 종종 며느리에게 동행을 권했다. 그러면 그 길 위에서 도란도란, 참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또 아버지는 가게를 하면서 40년 넘게 화교소학교(익산중국학교, 익산화교소학) 교장직을 맡아 화교 어린이들의 교육에 물심양면 지원했다.

문득, ‘유성동의 역사는 유성동만의 역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울림이 머릿속을 강하게 스친다. 이곳의 이야기는 인화동 포목의 역사는 물론이고, 익산 화교의 역사까지 함께 담고 있어서다.

화교이지만 부부는 “내 고향은 한국”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했다. 태어난 나라이고 지금껏 살았으니 그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피는 못 속이는지, 스포츠 경기를 볼 때 한국이 경기하면 한국을, 중국이 경기하면 중국을, 대만이 경기하면 대만을 우선 응원하게 되더라”고 말하며 웃었다.

과거 이곳에서 누군가의 어깨에 걸쳐져 차르르 흘러내렸던 옷감에는 누군가의 고운 시간과 고운 이야기가 담겼을 것이다. 세월 따라 옷감의 빛은 바래겠지만 거기에 담긴 고운 이야기 빛은 오래도록 화사할 것이다.
 

[2023년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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