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귀’로 담은 소태산, ‘몸과 마음’으로 전한 생애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주세불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따랐던 친견제자 법산 이백철 원정사(法山 李百徹 圓正師)가 12월 13일 열반했다.

원기24년(1939) 13살에 학업을 위해 총부로 찾아온 소년은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고 직접 숙소에 불을 때며 시봉을 했다. 당시 소태산 대종사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훌륭한 사람이 돼라”고 당부했고, 소년은 그 손짓과 말 한마디를 평생 모시고 살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나중에는 날 본 눈이라도 보고 싶어 할 것이다”고 했다. 법산 원정사의 ‘소태산 대종사를 본 눈’은 이제 감겼지만, 그 눈으로 보았던 풍경과 기억은 후진들에게 생생히 전해졌다. 지난해 명절대재 후 ‘소태산 대종사 장의행렬’을 인도할 때 법산 원정사는 “나는 어리고 작아서 상여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당시의 아쉬움을 전하며 “하지만 덕분에 일제의 제지 없이 끝까지 따라가며 지켜볼 수 있었다”는 말로 현장을 증언했다.

법산 원정사는 그동안 노구를 이끌고 “나는 정성의 사나이, 기어이 여래가 될 것”이라며 매일 아침 대각전을 지키고 앉아 후진들에게 초창기 총부 정진 문화를 이어줬고, “대각전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진리를 사진 찍어 처음 걸어두신 곳”이라며 하루에 세 번씩 찾아 참배와 기도를 올리면서 스승과 진리와 가르침에 대한 신성을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보여주기도 했다.
 

이백철 원정사는 지난해 12월 1일 명절대재 후 ‘소태산 대종사 장의행렬’을 고증했다.

법산 원정사는 첫 부임지인 용신교당에서 교리강습과 야학을 열어 농촌계몽과 진리를 향한 공부길을 제공해 전무출신 후진을 양성했고, 당리교당(현 하단교당)에서는 미약한 교세를 살리고자 100일 기도를 결제했을 때 정산종사가 현몽한 일로 교도들과 더욱 정성을 모아 교당을 재건하기도 했다.

재무부(현 재정산업부)에서 근무할 때는 공사가 중단된 서울회관 현장에 기거하며 지켜냈고, 영모원에 있을 때는 알봉에 모셔진 구인선진의 유해를 수습·이장하는 일을 맡았다. 이 밖에도 수계농원을 이사병행·영육쌍전의 산업도량으로 발전시키고, 중앙수양원(현 원광효도마을수양의집)의 도량을 안정시키는 등 평생 마른자리보다 험하고 궂은 자리를 피땀으로 지키고 개척하며 안정화했다.

인재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법산 원정사는 14명 전무출신의 출가연원이 됐고, 자녀 이종화·이여솔 교무와 손자녀 이동은·이은진 교무까지 3대를 잇는 전무출신가(家)를 세웠다.

열반소식을 접한 전산종법사는 “법산 원정사는 소년 출가 후 일생을 신성일관, 공심일관, 혈심일관한 대희사의 삶이었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대산종사 세 분 스승님을 한 분으로 모시고 역대 종법사를 한마음으로 받들며 교단의 큰 법맥을 이어주셨다”며 “퇴임 후에도 매일 아침 대각전을 지키던 모습은 후진들에게 소태산 대종사의 법의 표준을 보여준 큰 가르침이었다”는 말로 법산 원정사의 열반을 추모했다.

법산 이백철 원정사의 세수는 96세, 법랍 82년 8개월, 공부성적 정식출가위, 사업성적 정특등5호, 원성적 정특등에 해당돼 원불교 교단장으로 장례의식을 진행했다. 종재식은 원기109년 1월 30일 반백년기념관에서 거행된다.

[2023년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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