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누군가 무엇을 설명할 때, ‘이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야!’라고 한다거나, ‘이건 있는 건데 없고, 없는 건데 있어!’ 하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면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뭔 소리야, 그래서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이분법에 익숙해 사는 중생들에게,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이 텅 빈 진리를 알기 쉽게 설하려 할 때 소태산 대종사의 고심이 얼마나 크셨을까. 그들을 진리에 도달케 해주려고 궁구해 낸, 또 하나의 정확한 표현이 유무초월의 생사문이다. 

일원은 유(有)라고 해도 맞지 않고, 무(無)라고 해도 맞지 않는 유무초월한 자리다. 흔히 무엇이 ‘유, 있다’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형상 있는 것을 지칭한다. 반대로 형상이 없는 것은 ‘무’라 한다. 이 텅 빈 진리를 유라고 하려니 형체가 없어 유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는 없는가? 아니다.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어서 일체를 낳고 운영하고 사라지게 만드니 유다. 분명히 있는데 형상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진리다. 통상적인 유무의 관념을 넘어선, 있다 없다 한쪽으로 설명될 수 없는 자리를 유무초월이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한 비근한 예로, 우리가 늘 마시는 공기를 가져와 보자. 공기는 분명 존재하는 유다. 허나 형체도 냄새도 맛도 색도 없고 육근으로 접촉할 수도 없으니 무다. 이런 공기를 없다고 할 것인가, 있다고 할 것인가. 유라고도 무라고도 할 수 없다. 물론 단지 이해하기 쉽게 예로 든 것이다. 진리는 없는 곳이 없으나, 공기는 대기권 밖에는 없으니, 진리 허공과 공기를 같은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나가고 들어오는 문도 없고,
따로 갈 곳도 없다.

이 텅 빈 허공인 진리가, 지능이 완벽하고 못하는 것 없이 모든 능력을 다 갖추고 있어 전지전능이다. 진리는 전 우주와 만물, 땅속, 물속 일체를 다 보고 다 알아 완벽히 계산해 드러내며,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온 우주를 운영한다. 이렇게 우주 만물 허공법계를 성주괴공, 생로병사, 생주이멸, 춘하추동으로 어느 하나 빠짐없이 호리도 틀림없이 운영하는 법신불이 분명히 있으니 유며, 또한 텅 비었으니 무다. 텅 빈 것이 만능이 갖춰있어 못하는 일, 하지 않는 일이 없는데, 진리 그 본체는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유무초월한 텅 빈 만능자다.

진리는 또한 생사문의 역할도 한다. 유무초월한 그 텅 빈 만능자가 일체 존재를 낳기도 하고 거둬가기도 한다. 존재를 드러낼 때를 유, 존재가 사라질 때를 무로 볼 때, 일체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게 어느 순간 나타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어느 순간 사라진다. 

유무초월한 진리가 유와 무를 관장하는 문 역할을 한다. 지금이야 오고 감이 다 보이는 유리문이 있지만, 전에는 문을 열고 들어와야 존재가 보이고, 문을 열고 나가면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나타나고 사라지게 하는 지점을 문으로 상징한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탄생이고 나타남이며, 문을 닫고 나가면 소멸이며 죽음이다. 실상은, 나가고 들어오는 문도 없고, 따로 갈 곳도 없다.

본성인 나는 온 우주에 가득하니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영생토록 여여자연하며, 죽음은, 몸이라는 새 옷을 바꿔 입는 설레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유무초월한 진리는 무량수의 존재에게 영생토록, 낡고 너덜거리고 유행이 지난 옷에서, 딱 맞춘 새 옷을 주기적으로, 돈도 안 받고 거저 선물로 입혀서, 생사문을 통해 보내준다. 영생의 시점에서 보면 찰나지간 입는 이 옷, 감사와 보은으로 옷값이나 잘하면서 살 일이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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