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교권이 무너졌다고 했다. 1998년부터 시작한 교육계의 큰 전환점이 된 일명 이해찬 이데올로기, 즉 무시험전형 및 교육개편이 큰 경계를 몰고왔다. 당시 교편을 잡고있던 한수진 강동교당 교도회장은 그야말로 ‘이빨빠진 호랑이’가 된 듯 자존감이 무너졌다. 

그때 교당에서 들은 일상 수행의 요법 중 ‘세우고’와 ‘돌린다’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 ‘그래 고정관념을 돌리면 자존감은 다시 세워질 수 있어!’ 덕분에 한 교도회장은 과거 ‘교사’에만 머물렀던 자신의 모습을 탈피해, 학생들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며 소통하는 ‘선생님’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원불교는 그에게 세대에 적응하며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생님’이됐다.

1952년 만 71세 ‘용(띠)’인 한 교도회장은 강동교당의 도약을 꿈꾸고, 그에 맞게 실행력을 가진 교도회장이다. 한 교도회장은 교도 한 명 한 명을 역량있는 교도로 만들고, 분발심을 낼 수 있게끔 노력한다. 그가 불러일으키는 동남풍 덕분에 강동교당은 교화를 ‘회사’처럼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구상하는 교당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도 어변성룡 하기 전, 움트기 시작했던 시기가 있었다. “교당에 휴식기를 가졌던 시기, 갑자기 교무님이 합창단장을 시키셨어요.” 노래를 못 부른다며 손사래쳤더니 당시 여근영 교무는 “단장은 노래를 못해도 된다”며 설득했다. 올챙이 합창단에서 민들레 합창단이 될 때까지 8년간 단장을 맡았던 한 교도회장. 그는 덕분에 ‘교당 일’하는 재미를 서서히 배웠다. “돌아보니 ‘아, 교화는 이렇게 재미를 붙여줘야 하는구나’를 알겠더라고요.” 한 달에 한 번 겨우 나가던 ‘잠자는 교도’였던 그는 일주일에도 3~4번씩 교당으로 향했고, 교당에 집 같은 애정도 갖게 됐다. “교당 일이 고되면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났어요.” 그렇게 애정과 감사로 커진 마음은 그를 합창단장에서, 분과장으로, 또 교도회장까지 차곡차곡 키워줬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호응해주는 단원들에게도 그렇게 고마웠다.

“경산상사님이 자주 ‘어변성룡’을 말씀하셨는데, 교단 4대를 맞아 원불교와 강동교당도 용이 됐으면 좋겠어요.” 한 교도회장과 강동교당은 도반들의 업장을 거둬주고 부족한 부분은 메꿔주며, 넘치는 부분은 나누면서 용이 되기 위한 기반을 쌓아가고 있다.

[2024년 1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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