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또래보다 일찍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학교가 재미없었다. 혼자 생각으로 ‘학교에서 뭘 배울 수 있을까’ 늘 의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3살 되던 해, 그는 “중학교를 마치면 서울로 상경하겠노라”고 부모님에게 말했다. 사실 일방적인 ‘통보’였을 터. 그렇게 그는 16살에 서울로 올라가 20대 초반까지 도시생활을 했다. 

인연의 시작이었을까. 친구와 의기가 투합돼 농어민 후계자가 되고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일명 4-H 운동에 심취돼 새마을 청소년지도자 연수를 받으며, 좀 더 지식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가까운 도시 익산에 왔다가 좌타원 김복환 종사와 인연이 닿았다. 그렇게, 원불교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비롯됐다. 이후 만덕산에서 승산 양제승 종사를 모시며 출가의 뜻을 세웠다. 당시 그에게 ‘출가’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돈’보다는 ‘원불교 생활’이 좋아서 정토회관 건물을 관리해 주겠다고 한 것이 간사근무의 시작이 됐다. 

원기72년(1987) 전무출신 지원승인을 받아 원기77년(1992) 서원, 교단 3대의 매대(每代) 36년을 온통 공도사업에 전무한 선산 박중훈 수위단회 상임중앙. 전무출신으로서 공부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학생 때부터 일기법을 연마해 지금까지 기록해오고 있다.
마음 경계와 어려움이 있을 때 ‘일기’를 통해서 극복한 그는, 
우리(원불교) 공부의 마지막 보루는 ‘일기’임을 강조했다.

초임발령과 근무지를 소개한다면.
“교당교화 특히 청소년교화에 대한 열의가 있었지만, 초임 인사는 엉뚱하게도 부산서부교구사무소였다. 2년 근무를 마칠 즈음 교단의 교구체제 개편이 있어서 부산 동서부교구가 통합돼 부산교구가 됐다. 부산 8년을 마치고 교당교화에 대한 희망을 다시 품었다. 그러나 바로 익산 원불교학과 서원관으로 발령이 나 4년을 보냈다.”

이어 그는 법무실 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당시 좌산종법사 임기 마지막 2년을 시봉했다. 서원관(학부) 4년, 법무실(대학원) 2년의 시간은 남다른 의미다. 그는 “예비교무 수학 과정을 다시 밟은 것 같고 훗날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학생 때부터 기록해 온 일기.
학생 때부터 기록해 온 일기.

교구사무국 등 행정 이력이 이어지는데.
“이후에도 중앙교구 3년, 전북교구 3년 사무국장을 지내며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했다. 일에 대한 역량이 많이 길러진 6년이었다. 교구사무국 근무가 총 14년이 되니, 저의 의지와는 다르게 행정가의 이미지가 두드러진 것 같다(웃음). 다음 인사에서도 역시 교당교화를 나가지 못하고 수위단회 사무처장으로 6년을 근무하게 됐다. 종법사님 이하 어른을 모시면서 몸으로 큰 업장을 털어내기도 하고, 교단을 바라보는 견해도 재정립하는 기간이었다.” 

드디어,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교당교화를 나갈 수 있게 됐다. 정읍교당에서의 3년, 그의 표현대로라면 ‘꿈만 같은’ 기간이었다. 매주 일요일을 기다리며 화요일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살았던 그. 그러나 교단의 상황이 그를 그 자리에 오래 두지 못했다. 아쉬워하는 그를 보며, 한 후배 교무는 “먹지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다”고 말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연이 있다면.
“부산에서의 초임 8년에 많은 추억이 있다. 초임 1년 차에 부산어린이민속큰잔치를 시작했던 것, 부산대법회(1995년), 삼하나운동을 통해 1만3천여 명이 모였던 부산대법회(2000년), 그리고 열정으로 함께했던 봉공회, 생협 꿈밭, 다스름 등의 단체활동도 기억에 남는다.”

원불교학과 서원관에서 남학생들만의 여름방학 특별 미션으로 폭우 속에서 변산․만덕산․영산성지를 2박 3일간 도보 순례했던 기억도 선하다는 그.

아하데이를 중앙교구 주관으로 진행했던 일, 전북교구청 건립사업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던 일도 잊지 못한다. 교구 사무국장 시절, 그에게 큰 자산이 됐던 것은 매월 1회씩 이리교당과 전주교당에서 설교를 했던 일이다. 당시 교구장(왕타원 고원선 종사, 출가 추천인)이 후진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 기회를 준 덕분이다. 후진을 앞세우는 문화가 곧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반증이다. 
 

원기107년 출가교화단 총단회 사회.
원기107년 출가교화단 총단회 사회.

교화 어려움과 교단적인 현안 극복에 대한 생각을 전한다면.
“6년 전 교당교화(정읍교당)에 처음으로 나서보니 감회가 새롭고 즐거웠지만 어려움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밝힌 혁신 교법에 맞는 교화법이 아닌, 선천종교의 교화법이 교당문화에 안착돼 있었음이다. 예를 들어 자력신앙보다는 타력신앙의 비중이 크고, 상시훈련이 생활 속에 녹아들지 않는, 즉 ‘교법의 생활화’가 미흡하다고 느꼈다. 자기공부 점검이 아닌 설교중심의 법회 운영도 안타까웠다. 우리는 교화법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고, 소태산 대종사 당대의 교화법을 현재에 맞게 재정립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전산종법사께서 6년 동안 비중있게 부촉해주신 ‘상시훈련의 생활화’는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전무출신으로서 공부의 원동력이 있다면.
“상시일기 기록이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일기 양식이 막 개발됐다. 이때부터 일기법을 내게 맞게 연마해 지금까지 기록해오고 있다. 일기는 각자의 마음거울이다. 매일 매일 수시로 보면서 마음을 가꿔야 한다.” 

마음경계와 어려움이 있을 때 ‘일기’를 통해 극복했다는 그. 일기 기록은 물 샐 틈 없는 공부 대조로, 스스로의 업력을 다스리며 일심으로 실행하는 힘의 기반이 됐다. 그는 우리(원불교) 공부의 마지막 보루는 ‘일기’임을 강조했다. 
 

제271회 정기수위단회(좌측 두번째).
제271회 정기수위단회(좌측 두번째).

교단 제4대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불교 100년은 전무출신의 역사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의 전무출신은 규정과 현실에 괴리감이 가장 큰 시대에 살고 있다. 원만한 대안은 규정도 현실화되고 전무출신의 자세도 이에 따라 새로워지는 것이라 본다. 교단 제4대 1회를 마칠 때 즈음, 남성 전무출신이 여성보다 많아지는 남자교무 교당교화 시대가 온다. ‘남자교무 교화 주류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는 교단 제4대의 화두다. 특히 전무출신이 이 사회에 어떠한 귀감을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후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심사․심우가 있어야 한다. ‘심사․심우’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 말이라면 새겨듣는’ 관계를 말한다. 인간적으로 친한 것이 아니라, 법으로 친해야 한다. 심사․심우가 있으면 못 이룰 일이 없고, 천리라도 간다.”

그의 차에는 항상 연장 도구가 실려있다. 퇴임 후 그는 교화현장에서 교도와 지역민들을 위해 그들의 자식이 되고 친구가 되어주는 꿈을 꾼다. 그날, 연장 도구함도 활짝 열릴 것이다.

[2024년 1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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