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도자기는 인과가 확실하다.
원으로 된 물레를 돌리는 손끝에 온몸의 일심을 집중해야 바른 형태가 나온다. 잠시라도 허튼 생각을 했다가는 그대로 어그러져버리는 그 모습은 일원상 진리와 원리를 쏙 빼 닮았다.

음식이나 꽃 등이 담기는 보통의 도자기와는 달리 그의 도자기에는 특별하게도 ‘죽음’이 담긴다. 누군가와 가족처럼 지낸 반려동물의 죽음 이후의 흔적이 화장 후 이은주 교도(서청주교당)의 도자기에 담겨져 추억으로 닫힌다. 

그는 유골이 담길 도자기의 모양을 ‘집’으로 정했다. 죽음을 ‘결국 돌아오는 곳’처럼 편안하고 안락하게 맞이하라는 뜻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생명을 아끼어 죽기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일반이라” 하시었던가. “떠나는 개의 영혼을 위해 천도재도 지내주라”고도 하시었고. 그는 인과를 닮은 도자기를 빚으며 묵묵히 그 가르침을 따른다.

인생 어디에나 있었던 원불교
외할머니를 따라 엄마 손을 잡고 교당에 다녔다. 와글와글했던 어린이훈련도, 떨리는 마음으로 임했던 어린이 성가합창대회도, 원불교는 항상 즐거운 것 ‘천지’였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늘 교당에서 자신을 반겨주던 ‘교무님’이었다. “만날 때마다 온화했던 그 미소가 참 좋았어요.” 그래서였을까.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법회를 마치고 신발을 신으며 고사리 같던 새끼손가락을 교무님을 향해 ‘불쑥’ 내밀었다. “저도 교무님 하고 싶어요” 어린이회원의 말에 교무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래 꼭 그러렴”이라고 했다. 그 목소리에 가득 어려있던 따스함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에게 위로이자 응원이 된다.

“결혼도 원불교 덕분에 했어요(웃음).” 성인이 되고 원불교 익산성지에서 겨울훈련을 받을 때다. 정인화 교무의 소개로 만나고 있던 남편이 이 교도를 원광대학교법당으로 불러냈다. 

최대한의 로맨틱함을 이끌어낸 법당 안에서 그의 앞에 수줍게 내밀어진 예비 남편(권길마 교도)의 입교증. “입교증 프로포즈는 아마 세상에 하나뿐이지 않을까요?” 다이아가 박힌 반지도 없었고 현악단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홀도 아니었지만, 그 입교증 프로포즈는 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천도법문 되새기며 빚는 반려동물 ‘사후의 집’
할머니 기도로 투영된 원불교 정서 아래 성장
교당 내 집처럼 여기며 ‘나만의’ 역량 키워내

할머니 기도 덕분에 ‘잘 살았다’
많은 기도 중 가장 힘이 센 기도는 무엇일까. 이 교도는 단박에 ‘엄마의 기도’와 ‘할머니의 기도’라고 말했다. “살면서 큰 경계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이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은혜로 비롯된 것인데…. 그 모든 게 ‘기도’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이 교도의 외할머니는 그에게 ‘원불교’ 그 자체로 기억된다. 구순의 나이까지 교법과 자력생활을 실천하고 강조했던 외할머니는, 시골에서 손자녀의 집으로 오는 날마다 일원상 서원문과 삼학팔조를 사경한 종이를 들고 왔다. 할머니의 손에 들린 게 간식이 아닌 지루한 종이라는 점이 재미없다 여겼던 당시의 어린 그이지만 성장해서 보니 그 가르침 덕에 경계에도 부동(不動)할 수 있었다.

“열반하시기 전 ‘나는 정리가 다 됐다. 나는 흰 천 하나 덮고 간다’ 하시더니 다음날 열반하셨어요. 저와 가족들은 ‘이러한 모습이 곧 원불교의 천도구나’라는 가르침을 새기게 됐죠.”

이 교도와 유대감이 짙었던 친언니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할머니로 투영된 원불교 가르침은 큰 귀감이 됐다. “사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로 했어요. <대종경> 천도품을 읽으며 언니를 간호하고 인과품을 읽으며 언니에게 위로를 건넸죠.” 언니는 그의 의연함에 용기를 얻어 암담했던 투병시기를 원불교 가르침으로 원만히 넘겨내고 쌍둥이 조카를 낳았다. “할머니께 꼭 말씀 드리고 싶어요. 할머니 기도 덕분에 우리 ‘잘’ 살았다고. 또, ‘잘’ 살고 있다고요.”
 

객 아닌 주인의 마음으로
교당을 집처럼 여기며 그곳에서 위로받는만큼 ‘손님이 아닌 주인의 마음으로 공부해야겠다’ 여기던 그는 문득 자신을 돌아봤다. “‘내 재능으로 교화나 교단에 역할을 하려고 할 때 역량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염려가 들더라고요.” 역량을 키우는 게 중요하겠다고 자각한 그가 시작한 것은 바로 기도였다. “정부지원사업을 준비하며 매일 기도를 했어요. ‘제가 좋은 영향을 내서 교화 바람 한 자락을 불러올 수 있게’ 유익주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했죠.”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원불교를 위한 기도. 그래서였을까, 그 기도는 정말로 이뤄졌다. 

현재 정부지원을 받아 공방을 운영하는 이 교도는 교당이나 교단을 위한 역할을 연구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의 추억까지도 담아내는 ‘사후의 집’을 만들고 있어요.” 그가 만드는 ‘사후의 집’에는 늘 일원상이 그려져있다. 원불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일원상의 의미와 원불교의 천도를 꼭 전한다. 이 교도는 이 마음 모두가 원불교를 ‘집’으로 여겼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결과라고 했다.

물레를 돌리며 흙을 빚어 올릴 때 ‘그릇된 마음을 버릴 줄 알아야 온전함을 만들어냄’을 배운다. 그리고 그 온전함을 가마에 넣어 ‘무르익기’를 기다리면서 완연한 도자기를 탄생시킨다. 어느덧 40여 년을 바라보는 원불교 생애가 그랬다. 애정어린 기도로 빚어진 신심에 그릇됨을 덜어내주는 스승을 만남으로써 온전한 ‘내 공부’가 무르익는다.

[2024년 1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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