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원기로는 9년, 꼭 100년 전이다. 게다가 60간지의 첫해인 갑자년. 그해 세상에 ‘본격 등장’한 한 종교단체가 있다. 바로 원불교(당시 회명(會名) 불법연구회)다. 

여기서 ‘본격 등장’이라는 말을 쓴 이유가 있다. 1924년 그해에 원불교가 내디딘 역사의 남다른 의미 때문이다. 그 내딛음에는 이전까지의 역사와는 차원이 다른 결연함 같은 게 들었다. ‘세상 속으로’ 그리고 ‘세상과 함께’. ‘그해 소태산’은 세상 속으로 한발을 크게 들이는 동시에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교화’를 본격화 했다. 

실제로 ‘그해 소태산’은 변산, 익산(당시 이리), 전주, 서울(당시 경성) 등을 수없이 오갔다. 달리 말하면, ‘세상과 적극적으로 만나 소통했다’는 의미다. 그 가운데 많은 이와 인연이 닿았고, 그들은 현재의 원불교를 이루는 데 중요하고 소중한 기반이 됐다.

올해(원기109년)는 서울 상경, 불법연구회 창립, 만덕산 초선, 총부 기지 건설 등 원불교의 중요 역사가 100주년을 맞는 해다. 우리는 이 중요한 역사가 모두 ‘한 해’에 이뤄졌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그해 소태산’의 모든 걸음에는 생활 속 종교로서 원불교가 세상(시대)과 함께 호흡하겠다는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다시 1924년, 원기로는 9년. ‘그해 소태산’의 걸음을 좇는 ‘지금의 우리’는 100년 전 세상에 ‘본격 등장’한 불법연구회의 의미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
 

소태산 대종사가 교법 제정 시 거처했던 봉래정사 석두암(1940년대 모습, 6.25 한국전쟁 때 소실)
소태산 대종사가 교법 제정 시 거처했던 봉래정사 석두암(1940년대 모습, 6.25 한국전쟁 때 소실)

원기8년 8월, 하산을 간청받음

“이곳은 도로가 험난하고 장소가 협착합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광활한 곳을 택하여 도량을 정하시고 여러 사람의 전도를 널리 인도하심이 시대의 급선무일까 합니다.”

원기8년 8월 7일(음6.25) 서중안은 부인 정세월과 변산 봉래정사를 찾아온 자리에서 소태산 대종사에게 위와 같이 간청한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때가 온 것을 짐작하고 묻는다. “내가 세상에 나가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서중안이 답한다. “소자 비록 물질이 많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오나 능히 담당하겠나이다.”
 

추산 서중안
추산 서중안
칠타원 정세월
칠타원 정세월

소태산 대종사가 본격 세상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 데 서중안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의 일면.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간청을 받기 이전에 이미 하산을 계획했을 것이다. 실제 소태산 대종사는 간청받은 다음 해(원기9, 1924)에 변산에서 내려오는데, 당시 신흥종교들은 1924년 갑자년을 60갑자가 시작하는 첫해라고 해 ‘선후천 교역기’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전주 교동 임시출장소

하산을 간청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6일(음7.15), 소태산 대종사는 어머니 열반 소식을 접하고 영산으로 향한다. 어머니 열반 소식에 전국의 제자들이 조문을 오는 통에 장소가 협소해 불편이 심했다. 이에 도실을 옮겨 짓기로 결정, 11월(기록상 날짜가 특정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11월 9일~12월 7일 사이, 음10월)에 건축을 완료했다(영산원). 

이후 소태산 대종사는 12월(위와 같은 이유로 12월 8일~다음 해 1월 5일 사이, 음11월), 이리 박원석의 집을 거쳐 전주로 이동한다. <불법연구회창건사>, <원불교교사> 등의 기록을 보면 이리 박원석의 집은 소태산 대종사가 하룻밤을 머물거나 거쳐 가는 곳으로 자주 등장하고, 후일 제1회 평의원회의(임시요인회) 등이 열리는 장소로도 활용된다. 박원석은 김남천의 큰 사위로, 당시 만주철도 이리역 노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송학리(현 송학동)에 집이 있었다. 그의 집은 역과 가까워 지역 간 이동에 용이한 것은 물론, 늦은 시간 도착하거나 이른 시간 나서기에도 유용해 자주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리와 전주를 잇는 경편철도를 타고 전주에 도착한 소태산 대종사는 박호창, 이청춘 등이 주선한 10여 간의 집을 임시출장소로 정한다. 그리고 서중안에게 회상 공개 취지 규약 작성, 인쇄, 제반 준비를 일임하고 봉래산(봉래정사)으로 돌아와 백학명 선사를 만난다. 

5개월여 만에 봉래산으로 돌아온 소태산 대종사는 백학명 선사에게 하산할 뜻과 불법연구회의 창립 취지와 그동안의 경과 등을 말한다. 백학명 선사는 기뻐하며 변산을 떠나 정읍 내장사 주지로 가게 된 소식을 전하고, 자신의 새 임지에서 취지를 실현해보라고 제안한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송규, 김광선, 오창건, 이동안, 이준경을 내장사 파견 선발대로 보낸다.
 

원기9년 3월, 정읍 내장사

하산을 결심한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9년 3월(3월 6~30일 사이, 음2월) 이리 박원석의 집과 김제 서중안의 집을 경유해 정읍 내장사에 도착한다. 이후 소태산 대종사는 내장사에서 백학명 선사와 제자들을 만나 지난날의 논의를 이어가지만, 내장사 승려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로써 백학명 선사는 자유를 상실하고 심신이 불안해졌으며, 소태산 대종사는 그러한 백학명 선사를 달랜 후 내장사에서 나온다.
 

1920년대 초 이리역 앞 풍경(좌 이리역, 우 2층 건물 아오키레스토랑)
1920년대 초 이리역 앞 풍경(좌 이리역, 우 2층 건물 아오키레스토랑)
1924년경 이리역 플랫폼(세 개의 선로와 가로등으로 추정)
1924년경 이리역 플랫폼(세 개의 선로와 가로등으로 추정)

3월 30일, 서울 상경

내장사를 벗어난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은 3월 30일(음2.25) 아침, 이리역에서 서울(당시 경성)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당시 소태산 대종사는 34세였고, 상경길 수행은 송규·서중안·전음광, 길 안내는 최도화가 맡았다.

이들의 경성행은 기차 안에서 이뤄진 어느 날의 어떤 만남에서 비롯됐다. 원기8년 10월(10월 10일~11월 8일 사이, 음9월) 최도화는 익산-전주간 협궤열차인 경편철도(經便鐵道) (최초 사설철도, 훗날 전라선)에서 구례 화엄사로 불공가는 박사시화를 만나 생불님 소식을 전하게 된다. 이에 박사시화는 소태산 대종사와의 만남을 발원했고, 소태산 대종사가 만남을 허락함으로써 경성행이 추진됐다. 곧, 박사시화의 초대로 소태산 대종사의 첫 상경이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1900년 서울-인천 기차표(복제)
1900년 서울-인천 기차표(복제)

그렇다면, 그때 소태산 대종사는 어떤 기차를 타고 어떻게 경성으로 향했을까.

먼저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행에 호남선과 경부선을 함께 이용했을 것이다. 당시의 열차 시간표를 참고해 추산해 보면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을 태우고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한 호남선302 열차는 오전 10시 45분 대전역에 도착한다(당시 호남선의 평균 시속 34.8㎞). 이후 대전에서 경성으로 향하는 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오전 11시 44분에 출발해 오후 6시 40분에 도착하는 경부선13 열차이고, 또 하나는 오후 3시 20분에 출발해 오후 7시 20분에 도착하는 경부선7(급행) 열차다. 

뭐가 됐든 그날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은 이리에서 오전 7시경 출발해 오후 7시를 전후로 경성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열차 종류는 증기기관차이고 혼합열차(화차와 여객차를 연결해 운영하는 열차)였을 것이며, 이리에서 경성까지 표값은 3원 80전(현재 기준 11~17만원 예상)이었다. 

1924년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이 탔을 열차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12년 개통된 이리역에 대한 몇 장의 사진과 기록들로 추측하건대, 이리에서 대전으로 운행했던 첫 열차 모델은 푸러2형일 가능성이 높다. 더 정확히는 푸러102 열차로, 현재 익산역에서 터미널로 가는 길 벽화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경성역은 현재의 서울역 자리가 아니라 도보로 7분여 거리의 염천교 부근이다. 본래 남대문 정거장(남대문역)이던 것이 1922년 12월 29일 경성역으로 이름을 바꿨고, 1925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가건물 형태로 지은 2층짜리 목조 건물 형태를 유지했다.

경성역에 도착한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은 역 앞에 즐비하던 여관 중 태평여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1924년 태평여관 주인의 이름은 최인택이고, 태평여관은 당시 전국의 주요 인사들이 경성에 오면 묵는 곳으로 〈조선일보〉 등 신문의 근황 면에 소개돼있다.

3월 31일~5월 2일, 서울에 머묾

상경 다음날인 3월 31일(음2.26), 최도화는 태평여관으로 박사시화를 데리고 와 소태산 대종사에게 인사를 시켰다. 박사시화는 단박에 소태산 대종사가 생불임을 확신했고, 쌍둥이 자매인 박공명선과 상의해 박공명선의 딸인 성성원의 집(계동)으로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을 안내한다. 그리고 이날 박사시화·박공명선 자매는 소태산 대종사의 첫 경성 제자가 된다.
 

첫 경성 제자 박사시화·박공명선
첫 경성 제자 박사시화·박공명선
당주동 임시출장소를 마련하기 전까지 3~4일간 머물렀던 계동 성성원의 집
당주동 임시출장소를 마련하기 전까지 3~4일간 머물렀던 계동 성성원의 집

성성원의 집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3~4일을 머무는 동안 서중안과 전음광은 소태산 대종사가 임시로 머물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경복궁 앞 당주동(현 종로구)에 1개월 한정으로 가옥 20여 간을 빌려 임시출장소(현 세종문화회관 뒤편)를 마련했다.

이후 소태산 대종사는 임시출장소로 거처를 옮겨 5월 2일(음3.29) 이리로 내려오기 전까지 많은 경성 인연을 만났다. 공식 기록으로 4월 4일(음3.1) 이동진화 귀의, 김삼매화·최강동옥·이현공·최만수화 입문 등이 남아있다.
 

호남선 건설개요(1914) 출처: 〈전북의 역사문물전 12 익산〉/ 파란색 동그라미가 이리역
호남선 건설개요(1914) 출처: 〈전북의 역사문물전 12 익산〉/ 파란색 동그라미가 이리역

5월 3일, 전주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

5월 2일(음3.29) 아침 열차를 타고 경성에서 이리로 내려온 소태산 대종사는 박원석의 집에서 하룻밤 머문다. 하경 시 소태산 대종사 일행은 경성부터 대전까지는 오전 10시 출발해 오후 1시 33분 도착하는 경부선8호(급행)를 탔다. 대전에서는 오후 4시 5분에 출발해 6시 16분 이리에 도착하는 호남선317 열차나 오후 6시 35분 출발해 오후 8시 10분에 도착하는 호남선321 열차를 탔을 것으로 보인다.
 

하경 다음날인 5월 3일(음3.30) 소태산 대종사는 전주 전음광의 집(전주 완산동 곤질리)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서중안, 송만경, 이청춘, 이춘풍, 문정규, 박원석, 전음광 7인이 참석한 가운데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을 연다.
 

전주 전음광 생가터(현 고백교회)
전주 전음광 생가터(현 고백교회)

새 회상의 총부 기지로 완주군과 익산군 내 고산, 봉동, 왕궁, 북일 등이 거론되는 가운데 소태산 대종사가 “익산군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또는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의 생활이며 각처 회원의 내왕이 편리할 듯하니 그곳으로 정함이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발기인들은 이에 동의하고, 창립총회 개최 장소를 익산군 이리 부근 보광사로 정했다. 또 회관 건설지는 이리 부근을 실지 답사하고 지정하기로 약속한 뒤 그 사유를 각 방면 신자에게 통지했다.

창립 발기인 모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발기인 7인 중 유일한 여성으로 참여한 이청춘이다. 이청춘은 불법연구회 입회 전 기녀의 삶을 살았던 특이한 이력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소태산 대종사가 성별·출신 등에 구애받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을 불법연구회 창립 구상에 반영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이뤄졌던 이리 보광사(1920년 이리 최초의 사찰, 2019년 아파트 개발 부지에 편입돼 철거)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이뤄졌던 이리 보광사(1920년 이리 최초의 사찰, 2019년 아파트 개발 부지에 편입돼 철거)

6월 1일,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6월 1일(음4.29) 오전 10시, 전북 익산군 익산면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총회는 총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의장인 송만경이 진행했다. 임시의장은 본회의 창립취지를 설명한 후 회원들에게 “공심과 인내, 신성으로써 유시무종이 안 되도록 본회를 성립하자”고 독려했다.

창립총회는 먼저 임원선거가 이뤄졌다. 지명선거로 하자는 의견에 대해 이동안이 동의하고 김광선이 재청했으며, 오창건의 특청으로 만장일치로 소태산 대종사가 총재로 추대됐다. 회장으로는 서중안이 당선됐다. 회장이 등석하자 회원들은 박수로 환영했고, 임시 서기로 전음광이 지목됐다.

이날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서는 총 4개 안건이 다뤄졌다. 첫째, <불법연구회규약> 초안을 축조심의한 바 이의가 없었다. 둘째, 불법연구회의 유지를 위해 회원의 회비를 월 20전, 연 1원으로 하고 부족한 금액은 작농수익 및 의연금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셋째, 본 회관 건축이 급한 일이니만큼 가을까지 초가집이라도 건립하기로 하고, 송만경과 문정규가 각처 회원들의 모금을 담당하기로 했다. 넷째,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기성조합실에 본회 출장소를 설치해 지방 회원을 관할하고, 김기천이 주재해 담당하기로 했다. 

안건 심의 후 김기천이 재가·출가 예법과 솔성요론을 설명했고, 내빈 정한조 시대일보 이리지국장이 축사를 전했다. 이날 오후 세시에 끝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는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이 세상에 정식으로 처음 등장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 6월 4일자 〈시대일보〉 4면에 이리발 소식으로 불법연구회 창립이 실렸다. 불법연구회가 정식으로 세상에서 공개된 첫 사례다.
 

1924년 6월 4일자 〈시대일보〉
1924년 6월 4일자 〈시대일보〉

창립총회를 마치고 소태산 대종사는 상조조합을 신설해 종래의 기성조합 업무를 이어받게 하고, 각종 자금의 저축 제도를 마련했다. 그 종류는 총부 각부의 자산을 통일 저축하는 각부 자금, 회원의 유지 의무금 납입을 위한 의무 자금, 정기 훈련의 선비 조달을 위한 공부비 자금, 선조의 제사 기념을 위한 헌공 자금, 회원의 각종 사업을 위한 사업비 자금, 회원의 자녀 교육을 위한 교육비 자금, 회원의 생활을 위한 생활비 자금 등이었다. 

6~8월, 진안 만덕산 초선

6월 1일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마치고 며칠 후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산 만덕암으로 들어간다. 만덕산 만덕암은 좌포 김 참봉(김정진)의 산제당으로, 1년 전 겨울에 최도화의 주선으로 오창건과 송도성을 수행인으로 해 3개월여간 적공한 곳이다. 

<원불교교사>에 의하면 소태산 대종사는 진안 만덕산에 들어가 한 달 동안 선을 나며 김대거를 만났다고 돼 있다. 그러나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6월 1일에 있었고, 김대거의 할머니인 노덕송옥이 6월 6일(음5.5) 입문하고 8월 14일(음7.14)에 입회했다는 점, 경성 인연 이동진화의 만덕산 입산 날짜이자 입회 기록이 7월 21일(음6.20)이며 당시 만덕암에서 20일간 선을 났다는 기록 등을 종합해 살펴볼 때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산에서 6~8월(최대 6월 2일~8월 29일, 음5월 초~7월 말) 약 석 달간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 된다.
 

만덕산 김씨 산제당 터. 만덕산 김씨 산제당은 만덕암(萬德菴)이라고도 함
만덕산 김씨 산제당 터. 만덕산 김씨 산제당은 만덕암(萬德菴)이라고도 함

또 만덕암 산제당은 방 2간, 최도화의 헛간방 1간이 전부인 공간으로, 실제 12명이 동시에 거주할만한 곳이 못되었기에 소태산 대종사를 포함해 총 13명이 한 번에 숙식을 해결하며 선을 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개월여간 며칠씩 다녀간 제자가 총 12명이라면 모를까. 후일 정기훈련 동하선이 각각 3개월씩 이뤄진 점을 참고할 때도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에 머물렀던 기간은 오히려 석 달로 보는 게 타당성 있어 보인다. 박용덕 교무 역시 만덕산 초선 기간에 대해 ‘여름 한 철’을 보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어찌 됐든 만덕산 초선에 대한 기록은 정식으로 남아있는 게 없고, 비공식이다. 후일을 위한 정기훈련 시행 시험이 이뤄졌으리라 예상될 따름이다.

9월 29일, 총부 기지 매입 완료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에서 내려온 후 총부 기지 마련 작업은 더욱 속도를 냈을 것이다. 박원석의 안내를 받아 이리 이곳저곳을 살핀 끝에 소태산 대종사와 불법연구회는 9월 29일(음9.1)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 344-2번지를 매입 완료한다. 기지 3,495평(11,554㎡)은 박원석과 서중안(박금석·서상인)의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받았고, 당시 서중안은 3천여 평의 대금과 600여 원(쌀 28가마, 당시 쌀 한 가마 가격 21원 19전)을 희사했으며, 각처 회원으로부터도 7~800원이 모였다.

해당 기지 매입으로 불법연구회는 본격 활동의 중심을 갖게 됐다. 이는 이후 원불교의 교화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데, 총부는 원불교라는 조직의 체계화에 근간이기 때문이다. 또, 기지를 마련할 때 ‘무산자들이 살기 좋고 교통이 편리해 사람들의 내왕이 수월’한 점이 고려됐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10월 8일, 제1회 평의원회의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열린지 4개월여 뒤인 10월 8일(음9.10) 오전 10시, 박원석의 집에서 제1회 평의원회의가 열린다. 해당 평의원회의는 임시요인회 성격으로, 창립총회 후 5년간 정기총회 및 임시총회가 별도로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대신하는 회의로서 중요하다. 8인이 참석한 가운데 회장 서중안이 의연금 수납 보고를 했고, 이날 상정된 회관 건축에 관한 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의원들은 회관 건설 위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 받았고, 최종적으로 9월에 매입한 북일면 신룡리 344-2번지에 회관을 건축하기로 한다.
 

경성(서울)교화의 중요 기지가 된 창신동출장소(당시 이동진화의 수양채)
경성(서울)교화의 중요 기지가 된 창신동출장소(당시 이동진화의 수양채)

11월 20일경, 두 번째 상경

총부 회관 건축이 마무리될 즈음, 소태산 대종사는 두 번째 상경에 나선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는 창신동에서 머물렀다. 경성역에 도착해 전차를 타고 동대문 종점에서 내리면, 도보 10분 거리에 이동진화의 창신동 수양채가 있었다.

이곳에서 11월 22일(음10.26)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를 만난다. 그의 어머니 민자연화와 언니 이성각도 함께였다. 당시 이공주는 남편의 3년 상을 치른 지 10여 일이 지난 때였고, 박사시화·박공명선의 권유로 소태산 대종사와의 만남을 갖게 됐다. 소태산 대종사 첫 상경 시 ‘전라도에서 온 생불님을 만나 뵙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공주는 남편의 3년 상을 마치기 전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며 거절한 터였다. 

이에 박공명선은 소태산 대종사의 두 번째 상경 소식과 함께 동대문 밖 창신동 주소 한 장을 이공주에게 건넸다. 그러나 ‘창신동 605번지’가 ‘506번지’로 잘못 적혀 전달된 탓에 11월 21일(음10.25) 길을 나선 이공주 모녀는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지 못하고 계동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22일(음 10.26)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이공주 모녀는 삼세의 이치,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는 방법 등에 대해 질문했고, 이공주는 이날 법명을 받았다. 모녀는 이틀 후인 11월 24일(음10.28) 다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이성각의 딸 김영신이 법명을 받았다.
 

소태산 대종사 친필 하서(1926)
소태산 대종사 친필 하서(1926)

이리로 돌아온 소태산 대종사는 11월 28일(음11.2) 이공주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귀하신 네 분을 만나본 후로 견실한 성의와 고명한 재질을 생각마다 잊지 못하여 마음이 항상 즐거운즉 이번 경성행에선 대단한 보배를 얻었습니다.’ 이에 이공주는 11월 30일(음11.4) 바로 답서를 올리고, 12월 2일(음11.6) 쓰인 두 번째 하서를 12월 5일(음11.9)에 받는다. 두 번째 편지에서 흥미로운 것은 소태산 대종사가 이공주 모녀를 만나고 하경할 때 눈이 내렸다는 것과, 이공주 모녀가 창신동에 한 번 더 찾아갔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는 점이다. 또 소태산 대종사는 해당 편지에 ‘이와 같이 처사를 믿고 응하시니 장차 처사의 법은 공주의 물건인가 하나이다’라고 적어 후일 법낭으로서 이공주가 역할 할 것을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의 두 번째 상경과 하경은 날짜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위의 기록들을 토대로 11월 20일 즈음 상경해 11월 28일 이전에 하경했음을 알 수 있다.

12월, 불법연구회 회관 건설

10월 8일(음9.10) 회관 건축 계획이 결의된 뒤 회원들은 건축 공사에 착수, 엄동 상설을 무릅쓰며 12월(11월 27일~12월 25일 사이, 음11월) 목조 초가 2동 17간을 마련했다. 불법연구회 최초의 본관이 건축된 것이다. 본 공사에 든 비용은 약 1천 수백원이었다.
 

불법연구회 최초 본관인 도치원(7간)과 아래채 꼭두마리 엿집(10간) 건설
불법연구회 최초 본관인 도치원(7간)과 아래채 꼭두마리 엿집(10간) 건설
초기교단 유지대책으로 한때 운영하였던 엿방
초기교단 유지대책으로 한때 운영하였던 엿방

최초 본관의 이름은 도치원(현 본원실)으로 지어졌고, 본관 기둥에는 서중안 회장의 글씨로 ‘불법연구회’를 적어 간판을 걸었다. 본래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 344번지 일대는 도끼를 든 도둑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 해 ‘도치재’로 불렸는데, 소태산 대종사는 도둑고개라는 뜻의 도치(盜峙)를 도가의 고개라는 뜻의 도치(道峙)로 바꿔 땅의 기운을 전환했다. 

본관 7간 공사에는 정읍 신태인에 있는 어느 사무소의 재목을 옮겨와 활용했고, 아래채인 꼭두마리 엿집(현 세탁부) 10간 공사에는 원평 회원 조송광이 구해온 구월리 어유동 처갓집의 가옥 일부 재목이 옮겨와 쓰였다.

창립 당년 불법연구회 회세는 다음과 같다. 회원은 영광·김제·전주·부안·경성·진안 각지에 남자 60여 명, 여자 약 70명 총합 백수십 명이었고, 전무출신자는 영광 익산을 통하여 총합 십수 명이었다. 특히 당시 불법연구회 회원들은 유지를 위해 풍설에도 행상에 나섰으며, 엿밥으로 끼니를 대신하거나 침구도 없는 방에서 잠을 이뤘다. 그러나 전무출신에 뜻을 세운 사람들은 고생이라는 생각 없이 오직 이 회상에 참예한 것만으로 유일의 재미를 삼아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또 저녁 공양 후에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하루 지내온 바를 보고하고 감상 처리 등을 토의하며, 소태산 대종사는 간간히 법설을 통해 공부길을 지도해줬다.

무려 100년 전, ‘1924, 그해 소태산’은 이 거대하고 역사적인 일을 한 해에 모두 이뤄냈다. 세상으로의 한발, 나아가 세상을 위한 한발을 과감히 내디딘 ‘그해 소태산과 그해 불법연구회’의 나아감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서울 교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만덕산 초선, 총부 기지 건설 등에 담긴 ‘100주년’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다.

수집·정리= 편집국 
 

원기8년
ㆍ8월, 하산을 간청받음

12월, 전주 교동 임시출장소

원기9년
3월, 정읍 내장사 당도

3월 30일, 서울 첫 걸음

3월 31일~5월 2일, 서울에 머묾

5월 3일, 전주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

6월 1일,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6월~8월, 진안 만덕산 초선

ㆍ9월 29일, 총부 기지 매입 완료

10월 8일, 제1회 평의원회의

11월 20일경, 두 번째 상경

12월, 불법연구회 회관 건설


■ 참고 문헌 〈원불교교사〉, 〈불법연구회창건사〉, 〈대종경선외록〉, 〈교고총간〉,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 1·2, 〈전북의 역사문물전12: 익산〉, 〈원불교 경성교화〉 1·2, 〈소태산 박중빈 불법연구회〉 1·2·3, 〈소태산 대종사의 생애 60가지 이야기〉, 〈서울교당 93년사〉 1·2, 〈경성전〉, 〈변산전〉, 〈청하문총〉 1·2·3, 〈소태산, 서울을 품다〉, 〈만덕산 초선성지 88년〉,  〈소태산대종사 사진첩〉, 〈조선일보〉, 〈동아일보〉, 〈철도박물관 도록〉, 〈경성역신축기념사진집〉, 〈신문으로 본 이리·익산 사람들〉, 〈이리·익산의 근대, 호남의 관문을 열다〉 등

■ 웹사이트  문화도시익산, 디지털익산문화대전, IRI TO IKSAN, 철도산업정보센터 등 다수

[2024년 1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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