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당고모 할머니(삼타원 최도화 대호법)가 열반하던 해, 그가 태어났다. 전북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 온 동네 사람이 모두 원불교인인 일원마을에서 그 아이의 주 놀이터는 회관(마을에선 교당을 회관이라 불렀다)이었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구구단보다 더 잘 외우고, ‘영산회상 봄소식이’(교가)는 입에 착 달라붙는 유행가 마냥 구성지게 불렀다. 

겨울에는 집집마다 요를 가지고 와 일주일씩 교당강습(선)을 났던 마을 사람들, 그사이에 꼭 끼어 앉아있던 아이가 그였다. 초등학교 시절, 교당에 가면 검정치마 흰저고리 선생님(교무)의 책(경전) 읽는 모습도, 한 옥타브 밖에 없는 풍금으로 노래(성가)를 연주하는 모습도 멋지고 예뻤다. 공부도 잘했고, 노래와 춤도 잘 춰 반에서 대장을 도맡았던 아이는 그때 결심했다. “원불교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그렇게, 어린 시절 품었던 ‘원불교 선생님(교무)’으로의 꿈은 온통 그의 삶이 됐다. 일호의 사심도 주저함도 없었던 출가 반백년의 세월, 더할 나위 없이 ‘값진’ 교화자의 길을 걷고 있는 성타원 최심경 교무(서울교당)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숙겁의 인연이었던 스승
예기치 못한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 2년이나 늦게 중학교에 다니게 된 세세곡절의 사연이 그에게도 있다. 그 시절에, 그는 책을 섭렵했다. 교당(오수)에서 생활하며 중학교를 다녔던 그는, 공부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그는 언제든 교당 분위기를 이끌 만큼 춤과 노래도 기본기가 탄탄했다. 공부도 춤도 노래도 잘하던 그가 얼마나 기특했을까. 당시 안지숙 교무는 그를 한없이 가슴으로 품어줬던 한결같은 ‘내편’이었다. 김지행 교무(추천교무)의 엄격한 지도, 이정은 종사의 법의 훈증도 그에겐 약이 됐다. 숙겁의 인연이었던 스승에게 갊아진 품성 그대로, 그는 교역자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불맥학년의 깊은 법정
“40여 명의 불맥학년(동기 모임체)은 유독 활동적이며 단결과 단합이 장점이었다.” 원기62년(1977)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해 동고동락했던 도반들은 유난히 각별했다. 그때 기숙사 사감 교무(최세진 교무)는 “너희들 학년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걱정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최 교무가 그 시절의 어느 순간을 회상한다. 

기숙사 시절, ‘불맥의 대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탄생부터 열반까지 춤과 합창이 어우러진 감동의 대서사 무대를 기념관에서 성대하게 올렸던 일, 학림지의 원시라 할 수 있는 <불맥誌>를 창간해 학년 전원이 원고기사를 쓰고 인쇄했던 일, 제주도 남원, 도순, 애월지역에 봉사활동을 나가 제주도지사상을 받고 제주남원교당 창립의 기연이 됐던 일 등. 도반들과의 깊은 법정은 전무출신의 정신을 견고히 다지는 시간이었을 터다.

머무는 곳마다 일궈낸 교화역사
원기66년(1981) 출가식을 한 최 교무는 머무는 그곳에서 교화를 일궜고 역사를 만들었다. 첫 부임지인 돈암교당을 시작으로, 성동교당(현 장충교당), 대치교당에서는 어린이교화단을 결성해 청소년 교화에 정성을 다했다. 기관(교정원 교화훈련부) 근무 때는 ‘월간 어린이 교화지’를 창간해 어린이법회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매월 발간했다. 

해외교당(미국 서부교구 밸리교당)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치열했다. 결국 미국에서 교화하기 위해서는 언어 공부와 자격증을 따야 했다. 유학시절, 용금이 전혀 없는 모진 생활을 견디며 치열하게 공부했다. 자정이 넘도록 공부하면 심장에 과부하가 와서 자리에 눕지도 못했던 상황, 잠을 이룰 수 없는 그 시간도 그는 아꼈다. 그대로 선 정진에 든 것이다. 밤을 꼬박 세운, 하루 7~8시간의 선정진. 선의 진경에 들며 일원상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체득), 그 견고한 시간이 수도자인 그에겐 철주의 중심이 됐고, 석벽의 외면이 됐다. 
 

교무의 삶은
곧 교화 현장을 일군
역사가 된다. 

어느 한 곳 빈틈없는 그 마음
주임교무로서의 첫 교화지인 영양교당에서는 40대 초반의 젊음을 다 바쳤다. 영산선학대학교 기숙사 사감과 학생처장으로 근무할 때는 ‘학생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예비교역자를 향한 마음이 절절했다. 익산성지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식빵과 계란을 몇 판씩 샀고, 한걸음에 달려가 학년마다 샌드위치와 원두커피를 내려 공양했다. 행복해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가 더 행복했다. 

정관평을 걸을 땐 “우리 선진님들은 맨발로 이 언답을 다 막으며 방언공사를 하셨겠구나”싶어 가슴이 저려왔다. “성지에 근무할 때 100번은 오르리라” 다짐하며 삼밭재를 오를 때에는 무한한 감사심이 솟아났다. 어느 한 곳 빈틈없는 그 마음을 따라오기엔 몸이 버거웠을까. 그에게 암이 발병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암투병
암 4기라는 극도의 고통은 앉아서 선을 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죽어서 난 무엇을 가지고 갈까”를 생각하니 순간 순간이 너무 아까웠다. 머리도 발톱도 빠지는 극한 항암치료 속에서 그는 하루 10시간 이상 독경과 기도를 했다. 아침 좌선과 독경, 점심 성지성탑 기도와 행선에 이어 황등 앞 벌을 독경하며 걸었고, 저녁식사 후에도 기도와 독경에 매진했다. 하루 온종일 기도와 독경을 하다보면, 어느 날은 청정주 7천독으로 관절이 아플 정도. <대종경> 천도품과 인과품, <정산종사법어> 생사편을 줄줄이 외웠던 그는 “고통이 은혜임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법신불의 위력을 얻고 체성에 합일’하는 4년의 투병시간은, 암 또한 극복하게 했다. 그의 말대로 영생의 서원을 깊게 하는 시간이었다. 

교무로서 제2의 힘찬 출발
병마를 물리치고 교화 현장에 다시 섰다는 기쁨은, 그에게 ‘희망과 열정’ 그 자체였다. 우아교당에서의 교무의 삶은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였다. 교리선방을 개강해 6년 동안 12기를 진행했고, 그의 주특기인 춤과 연극, 노래 발표 지도도 유감없이 발휘돼 교도 단합은 물론 신입교도도 늘어났다. 교당 부채도 모두 상환했고, 교도들의 뜻을 모아 ‘둥근카페’ 커피숍도 운영해 다목적 교화공간으로 사용했다. 교당 옆 건물도 매입해 교당 규모도 커졌고, 그만큼 교도들의 신앙 수행도 한층 성장됐다. 4급지 교당에서 2급지 교당으로의 승급, 교단100주년 1000일기도 결제로 100년성금 완납 등 최 교무와 교도들은 교당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60대 출발과 함께 중앙총부에 근무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원불교100년성업을 기념하며 교단 최초로 ‘해외교역자대회’를 거행한 일이다.” 최 교무의 국제부장 시절이다. 해외에 근무하는 교무들에게 여비와 훈련비를 제공했고, 20년 이상 근무한 교무들의 공로를 치하했던 해외교역자대회는, 그에게 잊지못할 경험이다. 

교단 제4대, 가장 중요한 정신
서울교화100주년을 준비하며 서울교당에서 교역자로서의 최후 열정을 다하고 있는 그는, 교단 제4대 우리가 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은 ‘교법정신 회복과 실현’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공부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최 교무가 마음을 내보인다. “50여 년 전무출신의 길을 걷고 보니 공부의 원동력은 성불제중의 확고한 서원이었다는 생각이다. 초발심의 신심과 서원을 키워가는데 스승님의 지도와 동지들의 훈증은 큰 힘이 된다.” 

최 교무는 스승의 바른 지도와 사랑은 물론, 호된 경책도 전무출신의 바른 길을 걷는데 긴요한 약이 됐다고 했다. “그런 정신으로 살려거든 당장 전무출신 옷을 벗고 나가라”는 스승의 호된 꾸지람에 번뜩 정신을 차렸던 자신을 비춰보면, 스승의 엄한 지도는 다름 아닌 지극한 사랑과 격려였던 것이다. 

교무의 삶은 곧 교화 현장을 일군 역사가 된다. 머무는 곳마다 교화역사를 일군 그가 후진에게 부탁한다. “전무출신의 삶을 소중히 키워 성불제중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자.” 최 교무는 오직 이 마음이다.
 

[2024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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