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3대가 교단을 위한 공익심으로 살아온 집안이다. 그래서 박문철 영산교당 교도회장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광에서 나고 자라며 교당 생활을 해왔던 그의 눈에는 원불교의 고향이 곧 그의 고향이었고, 교당은 곧 그의 집과도 같았다. 그래서 교단 일이 무엇보다도 먼저였고, 고향의 교당인 영산교당이 가장 소중한 그였다. 더욱이 소태산 대종사가 회상을 창립한 그 시기부터 그의 조부모님도 그 현장에서 역사를 함께 해온 분들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우리 할아버지의 입교 연원이십니다. 조부모님께서는 무엇보다 교당이 우선이었고, 유가 가풍이 대단한 집안이었지만 돌아가실 때는 원불교 장례를 당부하셨죠. 그렇게 지금까지 제 가족들도 모태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박 교도회장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조부모님으로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원불교 교도로 맥을 이어온 가정이라는 것. 

대를 이어온 공심가
박 교도회장의 조부모는 교당 행사나 재 등의 일이 생길 때마다 손을 보태면서도, “공물은 아껴야 한다. 함부로 하면 안 된다”면서 공양시간이면 꼭 집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고 한다. 또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공도를 향한 그 정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닐까. 

또한 박 교도회장의 조부는 자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라고 여겨진 듯 열반을 앞두고서는 아들에게 교당을 세우는 일도 당부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께 ‘장례를 간소히 하고 그 돈으로 교당을 세울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 유시를 받들어 훗날 도양교당의 창립주로서 힘을 보태셨습니다.”

박 교도회장의 선친은 그렇게 부친의 유시를 받들어 뜻을 이뤄드렸고, 도양교당이 생긴 이후에는 당시 지부장(교도회장)으로서 책무를 다하며 교무를 보좌했다. 박 교도회장의 조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선친도 교당과 교무님, 교화를 위해서 물심을 아끼지 않았으며, 매사에 교당을 먼저 생각하는 공심으로 살았다.

그런 조부와 선친의 삶을 이어받기라도 하듯 박 교도회장도 교단의 일에는 항상 적극적이었다. 50세 초반에는 교구 청운회장직을 권유받아 10여 년 동안 힘을 보탰고, 이후 교구 원덕회장으로 다시 10여 년, 교의회의장으로 7년을 헌신했다. 무엇보다도 여든 중반을 넘긴 고령에도 지금까지 영산교당 교도회장으로서 활발히 활동 해오고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뭐든 열심히 해보려 합니다. 교당 생활에 있어서도 요즘은 가족들과 함께 교당 출석이라던가 다른 여러 활동도 더 마음을 챙겨보고 불공해 보려 합니다.”
 

선친은 조부 뜻 받들어

도양교당 창립주로 역할, 지부장 책무 힘써
교의회의장 역임하며 교구에도 합력,

“교단의 경제 지원도 고민돼”

교단 경제에 힘 보태고 싶다
박 교도회장은 20대 청년 시절부터 자수성가를 이뤄왔다. 양장점과 양복점을 마련해 나름대로 사업에 성공했고, 결혼예물 등도 판매하며 사업장을 넓혀갔다. 호시절이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고 근방에 나름 이름있는 가문이었으나, 어려움도 많았다. 아버지의 사촌 형제가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일이 화근이 돼 집안에 불이익을 겪는 일이 있었고, 후에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 고생도 이젠 더 없을 듯싶었다. 이만하면 됐으리라 싶을 만큼 홀로서기에 성공한 듯했고,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이뤄가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됐다.

“석재 사업에 투자를 했는데 낭패를 보게 됐어요. 하루아침에 다 잃게 됐죠. 빚도 지게 됐고요. 몇 년을 고생해서 이뤄놓은 것들이 모두 허사가 됐어요. 그땐 정말 힘들었죠.”
몇 년 동안 고생해 마련했던 재산과 사업체를 잃게 돼 큰 절망감에 어려운 시기였다. 그렇지만 참 신기하게도 그를 도와줄 인연을 만나게 됐고, 그 인연 덕분으로 빚을 갚아내는 방안을 찾게 됐다. 또 후에는 그가 소개해 준 사업을 맡아 다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농사짓는 이들에게 주는 ‘농기업자금’제도를 알게 돼 이자 부담을 줄이게 됐죠. 또 나중에는 수입고기 판매일도 맡게 됐는데, 그 일로 점점 일이 풀리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박 교도회장은 홍어와 굴비판매 등 여러 사업을 운영해왔고,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원만히 이뤄올 수 있었다. 지금은 굴비전문점(재운상사)을 운영하고, 최근 실뱀장어 양식사업도 시작하게 됐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무탈하게 사업장을 운영해 올 수 있었던 것이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공덕을 입은 은혜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공도에 힘써오신 삶이셨기에 제가 그 복을 받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교단에 보은하고 인연들에게 베풀고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이 엿보이는 사례가 있다. 15여 년 전 홍농교당이 이전 봉불할 때였다. 박 교도회장이 사비 5000만원을 희사했다. 또 직접 트랙터를 몰고 교당 부지를 정리하며 이삿짐을 날랐다. 영광교당을 건축할 때도 희사금을 보내며 물심양면으로 합력했다. 지난해에는 원음방송에 3000만원을 희사하며 문화교화 기관 후원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최근에는 새로운 화두가 하나 생겼다. 교단 경제자립을 위한 지원활동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교단 경제에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 고민이 있다 보니 어떤 방법으로 지원할 수 있을까 연구해보게 됩니다. 교단 일이니까요.”

[2024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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