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소태산, 남은 이야기

1924년, 원기로는 9년. 한 해에 이뤄진 소태산 대종사의 걸음은 바빴고, 과감했고, 다정했다. 그 걸음을 좇다 보면, 우리는 아마 1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수시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고, 걸음에 동행하며, 때론 같은 길 위에서 ‘세상을 위한 꿈’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에는 지난 1월 17일 자 〈원불교신문〉 특별기획 ‘1924, 그해 소태산 – 세상과 소통하다’에 미처 담지 못하고 남겨둔 이야기를 모았다. 
 

당시 이리역

1924년, 원기9년 당시 익산은 상당히 근대화된 도시였다. 특히 1912년 3월 6일 역무를 개시한 이리역은 이후 철도의 발전과 함께 익산을 급성장하게 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다만 역무 개시 당시 이리역은 이리-강경 간(21.2리) 호남선과 이리-군산 간 군산선 노선으로 시작했다. 이후 소태산 대종사가 이리역을 이용할 때에는 대전부터 목포까지(198.3리) 호남선 철도 부설 공사가 완료된 상태였다.

이리역을 기점으로 하는 당시 익산의 환경은 소태산 대종사가 새 회상 기지를 건설하는 데 주효한 배경이다. 실제로 소태산 대종사는 1924년 5월 3일(음3.30) 전주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 당시 새 회상의 총부 기지로 여러 장소가 거론되자 “익산군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또는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의 생활이며 각처 회원들의 내왕이 편리할 듯하니 그곳으로 정함이 어떠한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1924년 3월 30일(음2.25) 서울 상경을 위해 이리역을 이용했을 당시 이리역 앞에는 중국요리점 만리루, 한남여관, 아오키 레스토랑 등이 있었다. 이는 1923년 6월 27일 자 <조선일보> 등에서 확인되는데, 아오키 레스토랑은 한국 최초의 서양요리점 ‘청목당’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경성부 본정 입구에 생긴 청목당은 3층 건물에 옥상정원도 있었는데, 이 인기의 영향으로 곳곳에서 아오키 레스토랑이 생겨났다. 아오키는 청목, 즉 ‘푸른 나무’라는 뜻이다.

이에 원불교신문사에서는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아래의 사진❶이 1920년대 이리역 앞 풍경임을 확인해냈다. 어떤 자료에서는 해당 사진을 1940년대 이리역 앞 풍경이라고 설명하지만, 익산역은 1929년 9월 20일 근대양식으로 신역사를 준공했다. 이에 사진 속 역사가 목조임을 감안할 때 본 풍경을 1940년대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사진 속 오른쪽 높은 건물 2층에 아오키 레스토랑이 있었다.
 

1. 1920년대 이리역 앞 풍경
1. 1920년대 이리역 앞 풍경

경성행 첫발 닿은 남대문정거장

1924년 3월 30일(음2.25), 오후 7시를 전후(1안: 오후 6시 40분 / 2안: 오후 7시 20분)로 경성에 도착한 소태산 대종사가 기차에서 내린 곳은 남대문정거장(남대문역)이었다. 남대문정거장은 1922년 12월 29일 경성역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당시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위치를 이동해 ‘임시’역으로 존재했다. 즉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행 첫발이 닿은 역은 ‘임시 경성역(임시 남대문정거장)’인 것이다. 

원래 남대문정거장의 위치는 후일의 경성역, 그러니까 현재 문화역서울284(구 서울역)와 같은 위치에 존재했다(1908년 4월 13일 통감부철도관리국에서 펴낸 <한국철도선로안내(韓國鐵道線路案內)>에 삽입된 ‘남대문정거장급 부근 평면도❷’ 참조). 
 

2. 1908년 4월 13일 〈한국철도선로안내〉 ‘남대문정거장급 부근 평면도’
2. 1908년 4월 13일 〈한국철도선로안내〉 ‘남대문정거장급 부근 평면도’

그런데 경성부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경성의 관문이 될 중심역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도심과 가까운 기존의 남대문정거장을 경성역으로 개량하기로 결정된다. 이에 1922~1925년에 걸쳐 르네상스 양식으로 경성역 신축이 진행되고, 남대문정거장은 이름을 경성역으로 바꾸고 도보로 7분여 거리에 위치한 염천교 부근으로 임시 이동해 운영을 개시한다. 남대문정거장의 이동은 1921년 12월 21일 자 <동아일보> ‘오늘부터 이전되는 남대문정거장’ 기사와 사진을 비롯, 1923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❹ ‘24년간 희비극을 연출한 남대문역이 금일부터 경성역’에서도 확인된다. 이날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서도 이동한 위치에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문 연 경성역(임시 남대문정거장)에 관한 내용이 보도됐다.
 

4. 1923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 사진
4. 1923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 사진

이와 관련, 전영선 문화역서울284 공간투어 해설사는 “서울역의 전신인 남대문정거장은 1922년 12월 29일에 경성역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당시 가건물 형태로 지은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고 위치는 염천교 부근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본지 2129호 ‘100년 더The 공간 - 서울역’ 참조). 다시 말해 전 해설사가 설명한 ‘건물 형태로 지은 2층짜리 목조 건물❸’은 원래의 남대문정거장이 아닌 ‘경성역’, 즉 임시역(임시 남대문정거장)인 것이다.
 

3. 1924년 3월 30일 소태산 대종사 첫 상경 시 당도한 ‘임시’  경성역
3. 1924년 3월 30일 소태산 대종사 첫 상경 시 당도한 ‘임시’  경성역

1925년 르네상스 양식의 역사가 완공되고 경성역이 본래 자리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임시 경성역(임시 남대문정거장)은 자취를 감췄다. 만약 소태산 대종사가 1924년 첫 상경 당시 첫발이 닿은 역이 ‘임시’역이 아니었다면, 소태산 대종사가 첫날 머무른 숙소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경성 첫 숙박, 태평여관

당시 태평여관이라는 이름의 숙박시설은 여러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가장 알려진 태평여관은 경성부 태평통 2정목 19번지에 위치했다. 당시 태평통은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로, 북창여관, 숭례여관 등 숙박업소는 물론 호떡집, 의료기계점, 전당포 등으로 늘 붐볐다. 태평통 2정목은 지금의 태평로 2인데, 숭례문 위쪽부터 시청광장 일부에 이르며 소공동, 북창동 등에 걸쳐있다. 때문에 1924년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이 당시 경성역 인근에서 묵었다는 기록에 기반한다면, 1.5㎞ 안팎에 달하는 태평통 태평여관은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이 머물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소태산 대종사 일행이 1924년 3월 30일 첫 상경 시 묵었던 태평여관은 경성부 봉래정 1정목(현 봉래동1가) 혹은 남대문통 5정목(현 남대문로5가)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 각각 서울 중구 순화동 염천교 사거리, 또는 서울 중구 지하철 서울역 3·4·5번 출구 교차지점에 해당한다. 

이곳은 1920년까지 외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큰 시장이 있던 곳이다. 1921년 현재의 모양인 큰 길이 뚫리는데 이것이 칠패로다. 1925년 경성역(구 서울역) 완공을 앞둔 데다,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남촌에서 점차 내려오는 가운데 큰 길이 놓이며 여관이 밀집됐다는 분석이다. 당시 소태산 대종사가 머문 태평여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세종대로5길❺로, 현 칠패로와 세종대로 사잇길이다. 
 

5. 태평여관과 ‘임시’ 경성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
5. 태평여관과 ‘임시’ 경성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

태평여관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지만, 인근 숙박시설이었을 대동관이나 삼중여관에 대한 신문기사가 존재한다. 특히 1936년 제작된 <대경성부대관>에 근거하면 삼중여관의 위치는 경성부 봉래정 1정목 161번지로(162-2), 현재 서울역 앞 도로가 된 상태다.

첫 상경 시 당도한  ‘임시’ 경성역
… 전라선 모체  경편철도 이용 전주행


임시출장소 마련된 당주동 분위기

소태산 대종사는 상경 첫날 태평여관, 둘째 날부터 3~4일간 성성원·진대익의 북촌 자택, 이후 한 달여간 당주동 20간짜리 가옥(현 세종문화회관 뒤편 추정)에서 머문다. 이때의 기록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고 그 위치도 특정하기가 어려우나, 이공주의 기록에 의하면 당주동 임시출장소는 사글세로 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당주동은 어떤 곳이었을까. 옛 신문에서 당주동의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는데, 1924년 당주동은 이방인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지역이었다.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조선인들이 주로 머무는 곳은 청계천 이북의 ‘북촌(현재의 가회동 등과 다름)’으로, 그중에서도 당주동은 빨래터와 시장 등이 있어 발걸음이 잦았다. 경성부 당주동 48번지는 공설시장, 55번지는 이용완의 음식점, 146번지에는 요정, 118번지에는 복덕방이 있었다. 

경성역에서 창신동출장소

1924년(원기9) 3월 30일(음2.25) 첫 상경을 시작으로 이어진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행은 회상 창립의 중요 인연을 결집하게 했다. 1924년 첫 상경 다음날 만난 박사시화·박공명선 쌍둥이 자매를 시작으로 경성교화는 날로 성장했다. 이때 만난 귀한 인연 중 한 사람이 이동진화다. 이동진화의 수양채는 후일 불법연구회 창신동출장소가 된다.

창신동출장소는 1924년 11월 22일(음10.26) 이공주가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후 자택(계동)을 서울출장소로 활용(이때 소태산 대종사와 이공주가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의 집을 ‘계동연구회’라 칭한다)하다가 이후 서울교화의 본격 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곳은 서울 종로구 창신길 144-2(창신동 605번지)로, 서울교당의 서원과 정성을 바탕으로 매입해 원기102년(2017) 일원상봉안식을 올리며 서울성적지의 중심이 되고 있다.
 

6. 1899년 5월 4일 동대문 전차차고지에서 전차 개통식 풍경
6. 1899년 5월 4일 동대문 전차차고지에서 전차 개통식 풍경

창신동출장소가 마련된 후 소태산 대종사는 이리에서 올라오면 경성역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 종점❻까지 갔다.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밟았던 동대문 종점 터는 현재 동대문역 8번 출구 앞으로, 동대문 앞 도로와 동대문 종합시장 주차장에 표시석❼으로 남아 있다. 그간 연구된 바에 의하면 전차의 동대문 종점에서 내린 소태산 대종사는 ‘종점에서 내려 창신동 산골짜기로 10여 분 걸어 올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지도상 도보거리 1㎞, 21~22분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온다. 
 

7. 서울전차(경성전차) 동대문 종점 차고지 터 
7. 서울전차(경성전차) 동대문 종점 차고지 터 

첫 상경 기차 시각 

1924년 3월 30일 이리역에서 경성역까지 가는 방법은 총 3가지다. 이리-대전, 대전-경성 구간을 갈아타야 했고, 각 구간 두 개의 시간 중 하나씩을 이용했어야 했다. 당시 해당 구간에는 각각 급행열차와 일반 열차가 한 대씩 하루 총 2회 운행되고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일반열차-일반열차다. 7시 10분 이리 출발→10시 45분 대전 도착 호남선 302 열차를 탄 후, 11시 55분 대전 출발→18시 40분 경성 도착 경부선 13 열차를 타는 방법이다. 두 구간 모두 가격이 저렴한 일반열차인 데다, 3등석이 있고, ‘12시간에 걸쳐 경성에 도착했다’는 그동안의 연구 내용에 근거할 때 가장 가능성이 크다. “1930년 창신동 경성출장소 발령을 받았을 때, 소태산 대종사와 함께 ‘가장 저렴한’ 3등 열차에 올랐다”고 회고한 조전권의 기록을 비롯, 소태산 대종사와 수행 일행은 주로 3등석❽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1924년 발행된 〈조선철도여행안내〉에 실린 경부철도 3등석 내부 모습
8. 1924년 발행된 〈조선철도여행안내〉에 실린 경부철도 3등석 내부 모습

두 번째는 일반열차-급행열차다. 이리-대전은 호남선 302 열차로 같고, 대전-경성 구간을 급행열차로 타는 방법이다. 10시 45분 대전에 도착한 후 15시 20분 대전 출발→19시 20분 경성 도착 경부선 7 열차를 타는 방식이다. 만약 이 방법으로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이 상경했다면,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은 대전역(또는 대전)에서 5시간여를 머물렀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세 번째 방법은 급행열차-급행열차다. 두 구간 모두 급행을 타는 것으로, 조금 늦은 출발이다. 10시 45분 이리 출발→13시 00분 대전 도착 호남선 306 열차를 탄 뒤 15시 20분 대전 출발→19시 20분 경성 도착 경부선 7 열차로 당일 이리에서 경성에 다다르는 방법이다. 다만 이 경우는 7시간 35분이 걸리므로 ‘12시간이 걸렸다’는 연구 내용들과 맞지 않고, ‘오전에 출발했다’는 기록과도 매칭되지 않아 본지 2152호 특별기획 [1924, 그해 소태산 - 세상과 소통하다]에서는 제외한 바 있다.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

원기8년(1923) 8월 7일(음6.25) 변산에서 서중안으로부터 하산을 간청받은 소태산 대종사는 그해 12월(12월 8일~1924년 1월 5일 사이, 음11월) 이리에서 전주로 이동한다. 그리고 박호장, 이청춘 등이 주선한 10여 간의 집을 임시출장소로 정한다. 원기9년 5월 3일(음3.30) 전주(전음광의 집, 전주 완산동 곤질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도 연다.

이후에도 소태산 대종사는 전주를 수시로 오가며, 만덕산을 오갈 때도 거쳐 간다. 당시 소태산 대종사가 이리와 전주를 오가며 주로 이용한 것은 이리-전주 간 협궤열차(궤도 간격이 표준궤간 1.435㎜ 보다 좁고, 소형의 기관차나 차량을 사용하여 운용되는 철도)인 경편철도❾다. 
 

9. 1917년 〈신조선성업명감〉 전북경철화차운전상황
9. 1917년 〈신조선성업명감〉 전북경철화차운전상황

경편철도는 1914년 개통한 이리-전주 간 철도로, 당시 전국에서 사설철도로는 최초였다. 1912년 호남선이 강경-이리 구간을 우선해 개통되자 전라북도 도장관(지금의 도지사)이었던 이두황이 전주 시내의 유지들을 모아 철도의 전주 통과를 촉구하면서 ‘자체적인 철도 설치를 위한 운동비용을 마련하자’고 한다. 이에 뜻있는 인사들이 서둘러 ‘전북경편철도회사’를 만들었고, 철도 부설 허가를 얻어 운영을 시작했다. 이는 후일 전라선의 모체가 된다. 

또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 운행 시작에 따라 전주 태평동(상생정 22-1번지)에 철도 시발역이 신설됐다. 이는 전주역의 시초다. 전북경편철도선은 이리역을 출발해 전주읍에 이르는 15리(哩) 5분(약 25㎞) 거리의 철도로, 열차표 값은 1921년 기준 병등 64전이었다.

경편철도가 오가던 철로는 만경강 위를 지난다고 해 ‘만경강철로’라고도 불렸다. 본래 1912년 전북경편철도회사가 길이 476m의 나무다리(목교)로 만들었지만 1924년 일본이 국유화함으로써 식량 수탈을 하기 위해 철교로 개량됐고, 철교 개량 당시 한강철로 다음으로 길었다고 알려진다. 
 

10. 폐철교 위에 폐열차 활용해 만들어진 ‘비비정 예술열차’
10. 폐철교 위에 폐열차 활용해 만들어진 ‘비비정 예술열차’

만경강철로는 현재 일부가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폐철교 위에 폐열차를 활용해 만들어진 복합문화예술공간 ‘비비정예술열차❿’(전북 완주군 삼례읍)를 통해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로 우리를 만난다. 전주 쪽으로 향하는 철로를 바라보고 서면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그때 이 위를 지나셨겠지⓫’ 하는 생각이 들고, 만날 수 없지만 만날 수 있는 마음이 된다. 왜인지 모를 뭉클함은 덤이다.
 

11. 소태산 대종사가 경편철도로 전주를 오갈 때 존재했을 철교 위에서
11. 소태산 대종사가 경편철도로 전주를 오갈 때 존재했을 철교 위에서

봉래 그리고 태평

1924년의 기록을 훑다 보니 반복되는 명칭들이 있었다. 이름은 같되 대상은 다른 것으로, 봉래동과 봉래정사, 태평여관과 (전주) 태평동 등이다. 모두 100년 전의 소태산 대종사와 관련 있는 단어들이다.

봉래동은 소태산 대종사와 일행이 경성에서 처음으로 묵었던 여관의 주소지로 추측된다. 봉래정사는 변산의 봉래산에 있는 곳으로, 소태산 대종사는 그해 백학명 선사를 다시 만나 ‘불교의 새 운동’ 뜻을 나눴다. 1924년 그해 경성교화의 시작과 불법연구회 창립의 첫발에, 한자마저 같은 ‘봉래’가 나란했던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또 하나. 서울 봉래동에 있었을 숙소 이름이 ‘태평여관’이었다면, 또 다른 ‘태평’은 최초의 전주역이 만들어졌던 태평동이다. 전주 태평동에 위치했던 전주역 전신인 역은 소태산 대종사가 이리와 전주를 오갈 때 주로 활용했으며, 특히 원기8년(1923) 최도화가 박사시화를 만나 ‘생불님’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훗날 전라선)의 시발지다.

1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는 일. 누군가에게는 흘러간 역사 한 조각이, 어떤 이에게는 현재를 살게 하는 힘이 된다. 1924년, 원기로는 9년. 그해 소태산 대종사의 걸음을 좇는 일이 그랬다.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을 되짚고 복원된 세상의 기록에 비춰보며, 우리는 조금씩 소태산 대종사와 가까워졌고 매 순간 역사 속에 있었다. 순간순간 ‘희열’과 ‘감동’도 만났다.

결국, ‘다시 소태산’이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 속으로, 세상과 함께, 세상과 소통’하는 2024년 소태산이 될 차례다.


추가 참고 자료
〈대한제국·식민지 조선의 철도 여행 안내〉, 〈조선철도여행안내〉, 〈경성리포트〉, 〈전주미학〉, 〈경향신문〉, 뉴스버스, 서울시정일보, 나무위키,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 근대뉴스, 한국역사연구회 외 다수의 블로그 및 웹사이트

[2024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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