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원 교도
전순원 교도

[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을 먹고 출근한 남편은 불시에 사고를 당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아침 밥상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하는 후회에 머물기에는 줄줄이 달린 아이가 넷. 전순원 교도(전주혁신교당)는 씩씩하고 굳세게 살아내야만 했다. “그때는 일요일에 일하면 특근수당을 받을 수 있어서 교당 갈 엄두를 못냈어요.” 

그렇게 몇 년, 친정어머니가 열반하고 교당에서 49재를 지내게 되면서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교당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전 교도는 그 힘든 삶의 순간에서 단 한번도 원망을 품은 적이 없다. “원불교를 몰랐으면 원망만 하다 죽었을텐데, 원불교를 만나 이렇게 감사하며 살아요.” 켜켜이 쌓인 그의 세월 속 사무침은 원불교를 만나 단단한 ‘기백(氣魄)’이 됐다.

전 교도의 연원은 시어머니, 故 김법진옥 교도다. 여자가 함부로 밖에나가면 집 안에서 벼락이 친다고 할 정도로 엄했던 그 옛날, 시어머니는 틈나면 며느리를 ‘교당’에 보냈다. “너는 젊으니 설법 잘 알아들을 것이다”라고 하던 말씀 속에는 ‘가서 좀 쉬다 오니라’라는 어머니의 배려도 숨어있었을 터. 그렇게 교당에 가서 설법을 듣고 나름의 꿀 같은 휴식도 취하던 나날, 딱 하나 전 교도의 마음에 걸린 것이 있었다. 바로 공양미였다. “어머니가 식구 수대로 ‘좀도리 쌀 메라’ 하시는 말에 늘 ‘어머니가 알아서 하세요’ 해버리곤 했어요.” 그때는 쌀을 퍼서 밥을 지을 때 한움큼 덜어 교당에 내거나 나누는 것을 ‘좀도리 쌀 멘다’고 했다. 전 교도가 괜히 쌀쌀맞게 대답한 까닭은 힘들게 농사지은 쌀을 남에게 줘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심술이 다소 담긴 터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만난 교무님에게서 뜻밖에 말을 듣게 됐다. 아니 글쎄 교무님이 “순원씨 좀도리 쌀 잘 받았어요. 어쩜 그렇게 시어머니 말씀을 잘 받들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시어머니가 자신의 몫인 밥을 덜어 그동안 식구들 대신 좀도리 쌀을 교당에 전해왔던 것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진 그에게 시어머니는 “네가 농사지은 쌀이니 네가 공양한 것이나 매한가지지”라고 했다. 그때 누군가 경종을 울린 듯 머리위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는 그. “우리 시어머니가 꼭 부처님 같더라고요. 그래서 꾸준히 교당에 가게 됐어요. 대체 어떤 곳이길래 우리 어머니를 부처 만들어주셨나 궁금해서요.” 

그 호기심에서 시작한 세월이 55년. 이제 그는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  매 법회마다 출석도장을 찍고 있다. 감사를 전할 줄 알았던 시어머니의 좀도리 쌀 한 줌이 뿌려진 일원의 밭에 원망을 감사로 돌릴 줄 아는 전 교도의 신심이 풍요롭게 피어나는 듯하다.

[2024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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