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돛드레미 최초법어 터는 현 행정지명상으로 영광군 길룡리 구내 범현동(帆懸洞)이다. 당시에는 이씨제각(李氏祭閣)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현 사회를 본 첫 감상’과 그에 따른 새 세상 건설의 대책을 ‘최초법어’로 발표했다.

원불교 영산성지에 있는 마을인 돛드레미의 지명은 ‘돛단배가 법성포를 향해 가는 포구’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선진포와 강변 나루에서 흘러나온 돛단배가 와탄천에 굽어 돌아 구수리와 소드랑섬을 지나 법성포로 간다고 해 돛드레미라고 불린 것이다. 후에 범현동이라 칭해진 것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이 침략 야욕을 조직적으로 계획하면서 바뀐 것이다. 조선팔도의 모든 행정을 개편해 지도를 작성하면서 예부터 내려오던 우리말 지명을 말소시켜 한자로 고쳐 쓰게 되면서 바뀌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원년(1916) 대각을 이루고 얼마 후 노루목에서 범현동 이씨제각으로 옮겨 임시 거주처를 삼아 머물렀다. 노루목 초가는 몇 해 동안 개초를 하지 않아 빗물이 샜고, 폐가나 다름없던 상황이었다. 이씨제각은 영광 묘량면 영당에 사는 전주이씨들이 자신들이 사는 주거지와 선산(先山)이 너무 멀어 돛드레미에 제청(祭廳)으로 쓸 집을 마련해놓고 초상이 나면 장사를 지낼 때 이용하던 곳이다. 이씨제각을 주선한 이는 김광선으로 전주이씨들의 세장산(世葬山)을 관리하던 터였다. 김광선과 이원화는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기까지 여러 방면으로 조력하던 인물이었고,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과 함께 최초의 남녀 제자가 됐다.

소태산 대종사가 이씨제각에서 임시 거처에 머물 때,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원기 원년(1916) 초여름에 최초법어를 설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말과 경륜을 알아주는 이 없었고,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스스로 탄식하며 “그리 그리 통곡타가 소원 성취한 연후에 사오 삭 지내가니 소원성취 이 내 일을 어디 가서 의논하며 어느 사람 알아볼까 쓸 곳이 전혀 없어 이리 가도 통곡 저리 가도 통곡…” 하며 ‘탄식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도 소태산 대종사는 때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흥이 나서 “생사 고락 그 이치며 우주 만물 그 이치를 억만 사람 많은 중에 내가 어찌 알았는고” 하며 하룻밤을 흥타령으로 앉아 세우기도 하고, 이른 새벽 눈이 척설(尺雪)로 쌓인 가운데 굽 나막신을 신은 채 뒷산에 올라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돌아왔으되 신발에 눈 한 점 묻어 있지 않은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대종경선외록> 초도이적장 2절)

소태산 대종사는 음력 7월 경, 첫 제도방편으로 증산교 교파의 선전원을 구호동 집에 청해 치성하는 절차를 물어 특별한 정성으로 7일 치성을 지내며 교화를 위한 방편을 쓰게 된다. 치성 이후 보통 생각으로는 가히 추상할 수 없는 말씀과 태도로 좌우 사람들의 정신을 황홀케 한다.

그 후 몇 달 안에 소태산 대종사가 개안통령 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이웃 각처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이 40여 명에 달하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원년 12월 경에)이 중 가장 진실하고 신심 굳은 8명을 표준 제자로 내정하고, 원기2년(1917) 음력 7월 26일에 ‘최초의 십인일단(十人一團)’을 조직했다.

최초의 설법 터인 이씨제각은 소실돼 빈터로 전해오다가 원기97년(2012) 교단에서 매입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24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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