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편집국장] 내리는 이는 있었지만, 타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기차는 시간을 꼬박 지켜 섰다가 출발했다. 그건 오래된 약속이었다.

어쩌면 간이역에 도착하기 전, 기차는 역에 다다를수록 선명해지는 플랫폼의 ‘한 사람’이 못내 반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차를 바라만 볼 뿐, 끝내 오르지 않았다. 플랫폼 위에 선 사람도, 그를 태우지 못한 기차도 왜인지 서로 아련함만을 주고받았다.

간이역은 그 풍경을 ‘보통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한 자리에서 100여 년, 그동안 변화를 차곡차곡 겪으며 덤덤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드문드문, 이제 간이역에는 사람도 기차도 그렇게 찾아온다. 그렇게라도 잊히지 않는 게 다행인지 모른다.
 

남평역
남평역

정원 오솔길 지나 플랫폼으로
핑계는 ‘봄’이었다.

이른 봄을 찾으려면 남쪽이어야 했다. 그리고 남쪽에서 ‘실려오는’ 봄소식을 만나고 싶었다. ‘실려오는’에 꽂혀 기차를 떠올렸다. ‘기차가 봄을 싣고 달려온다면?’ 하고 생각했다. 경전선 간이역 여러 개를 목적지 삼아 나서게 된 흐름은 그랬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 철로를 따라 몇 개의 간이역이 선택됐다. 남평역, 능주역, 명봉역, 득량역…. 모두 1930년에 영업을 개시한 곳이다. 그 시간이 어언 100년이니 그동안 이곳들을 거쳐간 사람이며 기차 수는 얼마나 많을까, 그러니 그곳에 담긴 이야깃거리는 얼마나 두둑할까 싶었다.

첫걸음이 향한 곳, 남평역이다. 국가등록문화재인 남평역은 2014년 폐역이 되면서 선로 접근도 중단됐다. 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역사와 선로 사이에 꾸며진 아담한 정원은 봄기운을 품고 깨어나고 있었다. ‘그 시절, 아마도 정원은 역무원들이 직접 가꿨겠지. 그리고 남평역 플랫폼에 오르려는 이는 이 정원 사이 오솔길을 지났겠지.’
 

남평역은 우리나라 역 중 유일하게 역사가 선로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 그러다 보니 보통의 간이역들과는 다르게 대합실에서 선로가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곡선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만들어진 역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그래서 무정차역임에도 이곳을 지나는 기차의 속력은줄어든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경전선은 터널을 많이 지나지 않는다. 건설에 드는 돈과 시간을 아끼려고 빙 둘러 가는 방식을 택한 탓이다. 실제로 지도에서 남평역, 능주역, 명봉역, 득량역을 지나는 경전선 철로를 보면 쭉쭉 뻗은 직선이 아니라 고불고불 곡선이다.
역사 옆에는 남평역의 멈춤에 담긴 아쉬움을 달래고자 했던 레일바이크 운행 흔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마저 멈춘 상황. 그 철길이라도 걸을 수 있어 운치가 더해진다.
 

역에서는 시간이 생명
운이 좋았다. 명봉역에서 내리는 승객을 보았다.

하루에 명봉역을 거쳐 가는 기차는 상·하행 각각 4편뿐이니, 기차를 만나려면 시간이 잘 맞아야 했다. 시간을 맞추더라도 그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을지, 그 기차를 탈 사람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두 타이밍이 어쩌다 ‘딱’ 맞았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은 양손에 보자기 짐을 들고 있었다. 어디에 갔다 돌아오는 길인지 아니면 어디를 방문하려고 찾아오는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양손에 들린 짐에는 반가움 같은 것이 묻어있는 듯했다.

이때 승객과 함께 기차에서 내린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객실 승무원이었다. 그는 승객이 내리는 것을 돕고 승객이 기찻길을 건너 역사로 들어서는 것을 지켜본 후, 플랫폼과 철로 이곳저곳을 오래 살폈다. 간이역에서 기차를 타는 사람이 줄었다지만 혹 모를 일이다. 누군가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 뛰어오고 있을지도.

하지만 오늘 명봉역에서 탑승하는 승객은 없는 모양이다. 손목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한 승무원이 오르자, 기차는 명봉역을 뒤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명봉역
명봉역
득량역
득량역

역사에 울려 퍼진 ‘고향의 봄’
남으로 남으로 향한 끝에 도착한 간이역에는 역시나, 봄이 먼저 와있었다. 경전선의 최남단이자 서부경전선(광주송정역~순천역 구간을 칭함) 간이역 중 명소로 꼽히는 득량역이다.

원래도 작은 시골 마을이었던 데다 지역민이 감소하면서 역이 폐쇄될 위기에 처했었지만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디자인 프로젝트에 선정되며 다시 살아난 것으로 주목받는다. 

역 앞은 19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거리로 꾸며졌고 실제로 ‘다방’은 아직도 영업 중이다. 역사 내에는 역무원 복장 체험, 옛날 목조 발권창구 재현 등을 할 수 있어 생기가 있다.

역사에 놓인 풍금을 보자마자 떠오른 ‘고향의 봄’. 기억을 더듬어 건반을 짚어 본다. 풍금 소리에 절로 봄이 실리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광장 한쪽에서는 활짝 핀 매화를 만난다. 덕분에 이날의 간이역 나들이는 제대로 ‘봄맞이’가 됐다.

경전선 기찻길을 따라 나섰던 봄 마중에서 돌아오는 길, 춘포역에 들렀다. 경전선이 아님에도 굳이 찾아 들른 이유, 역시 ‘봄(春)’ 때문이 아닌가.
 

능주역
능주역

남평역과 명봉역 사이 능주역은 연주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지석천이 흐르는 풍경으로 서부경전선 최고의 포토존으로 꼽힌다. 이동휘·고아성 배우가 직접 그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정표’도 인상적이다.

[2024년 2월 2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