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서울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이 “나는 서울을 가 본 적이 없어서, 꼭 서울을 가보고 싶다”고 평생 갈망한다면 참 어이가 없는 일이다. “여기가 바로 서울인데, 무슨 서울을 또 어떻게 간다는거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서울 가기를 갈망한다면, “잘 들어봐, 너는 한시도 서울을 떠난 적이 없고, 지금도 서울에 살고 있어. 따로 어디에 서울이 없고, 여기가 바로 서울이야” 하며 어떻게든 알게 해주려고 몇 번이고 거듭 일러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떠난 적 없이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그러니 부질없이 서울을 가려고 애쓰지 말고, 이미 서울에 살고 있음만 각성하면 된다. 일체 존재는 한시도 성품이라는 서울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 성품을 깨달으려고 애쓰지 말고, 이미 온 우주가 온통 성품 자체임을 자각하면, 그것이 바로 견성이다.

내가 성품을 본다거나, 내가 성품을 찾는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불가능하다. 성품이 바로 난데, 내가 성품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폐다. 그 말은 단지, 선각자들이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낸 표현일 뿐이니, 말에 속으면 안 된다. 성품을 찾거나 본다는 것은, 성품과 찾는 자가 나눠지게 되므로, 이미 전제부터 잘못됐다. 따로 어디에 있는 성품을, 또 다른 어떤 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성품과 나는 동일자다.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이 같아서, 누가 무엇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따로 있는 내가, 성품을 깨달으려고 해서는 결코 깨닫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실제로는 누가 무엇을 깨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내가 따로 없고, 한시도 성품을 떠난 적이 없음을, 그냥 믿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서울 가려는 망상만 버리고, 원래 서울을 떠난 적 없음만 알아차리면 끝이다. 마음은 온 우주에 가득히 있어서, 어디서 어디로 갈 수 없고, 찾으려는 나와 찾을 성품이 동일함을, 그대로 ‘믿는 마음’이 깨달음의 ‘열쇠’다. 
 

어리석은 내가 따로 없고,
한시도 성품을
떠난 적이 없음을, 
그냥 믿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깨달음.

깨달음을 따로 갈구하면 결코 깨달을 수 없다. 그렇다고 깨달음에 대한 마음조차 내지 않으면, 영영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가 되며, ‘내가’ ‘성품을’ 깨닫고자 하면, 그건 불가능이다. ‘나’ 하나를 따로 ‘설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어긋난다. 털끝만큼도 간격이 없이, 바로 눈앞에, 그리고 온 우주 가득히 성품이 있다!

마음이, 성품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그 마음을 비우든 닦든 가라앉히든 할 수 있다.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데, 누가? 어디서? 어디로? 비우고, 어디를? 닦는단 말인가. 견성하지 않은 이는, 마음을 비울수도, 다스릴 수도 없고, 공부할 수도, 닦을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다! 엄밀히 말해 마음공부나 수행이 이뤄질 수 없다. 

어허,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내가 다 보고 알고, 내가 다 기억하고, 내가 기분을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먹고 그러는, 이것이 마음이지 뭐가 마음이냐고? 진짜 마음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 있는 것, 주관하고 있는 자, 주인이다. 

나는 우주 가득한 성품이며 마음이다. 일원은 본원이요 심인이요 성품이니, 나는 공적영지한 성품이며 마음이며, 일원이며 진리이며 신이다. 성품이 하루 종일 이 심신을 작동시키는 주인이다. 온 우주가 나 하나로 가득하고, 우주 안 모든 것을 성품인 내가 다 작동시킨다. 

나는 우주에 가득하여 떠난 적도 떠날 수도 없는 성품이다. 온 우주가 서울이며 성품이며 마음이며 나다. 나는 우주라는 서울에 산다! 서울에서는 서울을 갈 수 없다!

/변산원광선원

[2024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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