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과 벌은 조직을 운영하는 저울과 같다. 상이 너무 과하면 진실성을 의심 받고, 벌이 너무 과하면 불평과 불만이 생긴다. 진문공은 이에 대해 ‘상벌이 분명치 않으면 작은 일도 이룰 수 없지만, 상벌이 분명하면 가히 천하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초기교서에 나타나는 소태산의 상벌은 저울추처럼 엄격하고 잣대처럼 분명했지만, 또 다른 측면도 있다. <대종경> 실시품 38장에서 밝힌 소태산의 상벌은 대체로 “다 잘하는 가운데 혹 잘못이 있으면 그 조그만 흠이라도 고치기 위하여 상은 놓고 벌만 내리시거나, 잘못 하는 것이 많은 가운데 혹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 마음을 살려내기 위하여 벌을 놓고 상을 내리”는 응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자녀를 가르침에 대해 ‘만일 상벌이 분명하지 못하면 그 자녀에게 각성을 주지 못한다’는 내용을 참고한다면 상벌은 엄격해야 함이 본의라 할 수 있다.

상과 벌을 논하는 논공행상은 간혹 성공한 조직의 미래를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곧, 상은 없고 잘못만 탓하는 무상필벌형 조직이나, 상과 벌이 정확한 신상필벌형 조직, 그리고 상도 없고 벌도 없는 무상무벌형 조직으로 평가하면서 그 조직문화를 논한다. 이 중 가장 걱정스런 조직으로 무상무벌을 꼽는데, 이유는 곧 주인정신의 실종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특히 무상무벌형 조직이 우려되는 것은 책임을 묻지 않기에 연공서열이 우선시 되고, 또 이런 조직에서는 태생적으로 거짓과 모략이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즉, 낮도깨비들이 판을 치고 거짓이 진실인냥 가면을 쓴 채 독버섯처럼 자란다면 그 조직은 미래를 장담하기 힘들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문화에서는 일하려는 사람마저 의욕을 상실하는 병에 들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무상무벌의 책임은 그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뿌리하고 있다. 즉, 스스로 떳떳함이 부족하기에 벌을 내리기가 힘들고, 상을 내릴만한 판단이 부족하기에 잘잘못이 흐지부지 흐트러진다. 

정확하고, 부끄럼이 없으며, 당당한 자만이 내릴 수 있는 신상필벌의 칼날은 그래서 무뎌지기 마련이다. 신상필벌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조직이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이고, 무상무벌이 판을 친다면 그 조직은 이미 병들었다는 증거다.

어느 순간부터 원불교 교단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아무리 잘 해도 흔적이 없고, 잘못을 저질러도 유야무야 덥기에 급급하다는 평이다. 또 공의라는 이름 아래 ‘능력과 성과가 무력해지는 공평’이 인재퇴화의 원인도 된다.

진리는 때론 냉정한 것이다. 인재 아닌 인재 살리기에 애타지 말고 정확함과 엄격함으로 믿음을 쌓아야 종교 본질과 조직 균형이 함께 살아난다.

[2024년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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