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깨달음을 얻으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흔히 하는 상상들이 있다. 젊은 스님보다 노승, 차갑기보다 자비로움, 말 많기보다 과묵함, 울고 웃기보다 감정이 한결같음, 답을 몰라 고민하기보다 항상 맞는 완벽한 답을 주기 등이다. 더 나아가 남의 마음을 다 읽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훤히 내다보며, 척 보고 남의 운명을 아는 듯 한마디 툭 던지고 간 말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는, 뭐 대충 그런 이미지다. 

어떤 이는 깨달음을 얻으면 나쁜 일도 당하지 않으며, 병이나 치매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늘 평온하고 자비로우며, 남을 위해 자기 것 다 내주고, 지혜가 넘쳐 모든 판단이 항상 정확할 것이라 여긴다. 이거, 다 지어낸 것이다. 깨달은 이들을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는데,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 

흔히, 그 사람의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의 깨달음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깨달음의 여부는 일반인들이 알아볼 정도로 보이는 차원이 아니다. 그 이상의 경지가 아니면 절대 알아볼 수 없다! 행동하는 것을 봐서는 결코 견성 여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어 그 이상의 경지에 있는 이가 이런 말을 한다면 혹 맞기도 하겠지만, 견성도 못한 이들이 하는 말이라면, 글도 못 깨친 아이가 박사 논문을 이러쿵저러쿵 평하려는 정도로 비유하면 맞겠다. 

종교적인 수행을 잘하여 인품이 뛰어나 말과 행동이 만인의 롤모델이 되는 이라도, 그가 깨달았는지 아닌지 겉모양 봐서는 알 수 없다. 역으로 언행이 완전 엉망이어도 그 사람의 깨달음 여부는 모르는 일이다. 진리를 시원시원하게 잘 설하는 것만 듣고는 또한 깨달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으로는 결단코! 깨침 여부를 알 수 없다.

견성과 성불은 다른 차원.
견성 후 무량한 수행을 거쳐
성불이 된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능력, 상대를 견성하도록 해줄 능력, 상대의 견성 여부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다 각각 다른 영역이다. 깨달음을 얻었어도 대개는 첫 단계에서 멈춘다. 아주 드물게 상대를 견성으로까지 이끌기도 하는데, 이게 매우 어려워 옛 선사들도 몽둥이를 들거나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그냥 보냈다. 세 번째 단계는, 여러 차례의 정밀한 테스트로 그가 확실히 보았는지 확인해주는 일이다. 처음엔 자칫 속을 수도 있어, 시차를 두고 재차 삼차 확인해줘야 하는데, 이 역시 깨달음을 얻은 이라도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못 깨친 이가 자비로울 수도, 깨친 이가 자비롭지 않을 수도 있다. 몽둥이로 치고, 화내고, 혼을 내고, 울고, 웃고 다 하되, 깨친 이는 바로 돌이킬 자성을 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진리 역시 자비롭기만 하다면, 만물을 다 죽이는 겨울이나 죽음, 액운, 과보가 없어야 맞다. 만물을 영생하게 하니 자비라 한 것이지, 인간이 구하는 상대적 자비를 말한 것이 아니다. 

견성과 성불은 다른 차원이다. 견성 후 무량한 수행을 거쳐 성불이 된다. 견성이 글 깨침이라면, 글을 깨친 후 바로 논문이나 대하소설 쓰는 경지인 성불이 되겠는가. 견성 즉시 성불이 되는 경지를 주세성자라 하는데, 이처럼 깨침과 동시에 심신자유가 되는 돈오돈수를 그대는 꿈꾸지 말라. 견성은 대개 그렇게 오지 않으며, 정말 아주 아무것도 아닌 데다, 오랫동안 별 변화도 없을 터이니 실망할 준비들 단단히 해야 한다. 

남의 수행 잘하네 못하네 평하느라 허송세월 하는 대신, 그대의 깨침 여부나 급히 돌아볼 일이다. 눈도 못 뜬 이가 남의 언행을 보고 견성 여부를 안다고? 소가 웃을 소리 말고.

/변산원광선원

[2024년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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