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수 교무
장진수 교무

[원불교신문=장진수 교무] <불법연구회창건사>(이하 <창건사>)에 ‘창립 당년의 회세’가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회원 상황은 영광·김제·전주·부안·경성·진안 등에 남자 약 60명, 여자 약 70명 정도였고, 전무출신자는 영광·익산 등을 통해 수십 명에 이르렀다. 회관 건축 이전부터 전무출신이던 김광선, 오창건, 이동안, 이준경 등은 박원석(송학리)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이 시기에 송학리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토지를 빌려 근근이 농사를 지었다.

<창건사>에 따르면, 1924년 9월에 박원석의 집에서 개최된 임시요인회는 제1회 (임시)평의원회를 말한다. 회관 건축에는 서중안 회장의 3천여 평의 기지 대금과 6백여 원의 현금 의연이 있었고, 각처 회원의 7, 8백여 원의 의연금이 있었다. 11월에 공비 약 1천 수백 원이 들어간 목조에 초가를 이은 2동 17칸의 첫 회관이 건축됐다. 이때 유공인으로는 전무노력자 김광선, 오창건, 이동안, 이준경, 송규, 송도성, 전음광, 송만경,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조갑종 등 12인, 특별후원자로 서중안, 서동풍, 이청춘, 이동진화, 이공주, 전삼삼, 최도화, 박원석, 박사시화, 장적조 등이며, 그 외 각 회원의 의연명록(義捐名錄)은 별책인 유공부(유공인명부)에 상세 기입했음으로 생략됐다. 이때 자산은 영광의 언답과 영광(출장소), 익산(회관), 부안(봉래정사) 등의 건물 등이었다. 하지만 회관 건축 이후에도 전무출신의 생활 방로를 마련하고자 12월에 엿장사(제이업)를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창건사>에서는 “그러나 전무출신에 입지한 모든 사람들은 조금도 거기에 고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고 오직 이 회상에 참예한 것만으로 유일한 재미로 삼아서 … 대종사께서 간간히 법설을 베푸시어 모든 사람의 공부 길을 지도해 주시니 그 단란한 상황은 이가 곧 지상 천국인가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창립 당년의 회세’에서 부서의 경우, <규약>의 7부서 중 서무부, 교무부, 상조부 3부의 형식만 두고 서무부장 오창건, 서무부 서기 송도성, 교무부장 송만경, 상조부 서기 전음광을 선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상조부는 상조조합부의 준말이다. 이후 ‘제3회 평의원회회록’(1926년 3월 26일)에 보면 ‘상조부 임시관리원’으로 전음광이 상조부 개황을 간략히 보고한 후, 안건으로 상조부장 임명 건을 다룬다. 먼저 회장이 상조부의 연혁을 소개한다. “상조부는 본회 7부 기관 중 제일 다사(多事)한 바인데 대정14년(원기10) 12월에 이형천(동안)씨 외 7, 8인으로부터 비로소 저축을 개시한 이후 우금(于今) 것 정식 임원이 없이 전세권(음광)씨가 임시 자담하여 온바” 정식 임원의 추천과 문부(文簿, 문서와 명부)의 정리가 필요함에 따라 ‘상조부 임시관리원’ 전음광이 상조부장에 정식 임명됐다. 상조부 업무는 창립 당년에 시작됐지만, 실제 상조부장은 창립 2년 차에 선임된 것이다.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장

[2024년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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