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방언사무소 터. 원기28년(1943) 사진
옛 방언사무소 터. 원기28년(1943) 사진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정관평 방언사무소 터’는 원불교 교적 제1호로 등록돼있으며, 강변주점이라고도 불린다. 고진관이라는 이가 운영하던 강변 나루 주점을 매입해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이 방언공사를 진행할 때 임시사무소로 사용했던 곳이다.‘정관평 방언사무소 터’는 영촌마을 앞 갯벌의 주막으로 현 위치로 보면 영산선학대학교 주차장 앞의 삼거리 도로 일부와 그 옆 농토(길용리 170-1)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소태산 대종사가 구호동 가산을 정리했을 때 임시 거주처를 마련했다고 하는데, ‘정관평 방언사무소 터’가 그 임시 거주처로 추정되며, 방언공사 당시 소태산 대종사의 가족들과 이원화가 이곳에서 인부들의 식생활을 담당했다.

방언공사를 시작하기 전 소태산 대종사는 먼저 방언공사 자금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 시작이 원기2년(1917) 음력 8월 여덟 명의 제자들과 함께 조직한 저축조합이다. 

저축조합을 운영하면서 소태산 대종사는 과소비와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돈을 저축하게 하고, 공동출역을 권장해 자금을 모았다. 또한 술·담배를 끊게 하고, 의복·음식 등을 절약하게 했으며, 명절 휴일을 줄여 특별 노동 수입 마련, 부인들에게는 시미(후일 보은미)를 모으게 했다. 
 

위성사진으로 본 위치(길용리 170-1)
위성사진으로 본 위치(길용리 170-1)

또한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제군이 이미 나를 믿음이 깊어져서 우리의 평생은 서로 떠나지 못할 처지에 있는바 우리가 장차 시방세계를 위해 한 가지 큰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어떠한 기관과 어떠한 조약을 세워야 할 것이므로 내 이제 기성조합의 기관을 건설하여 내두(來頭)에 모든 일을 준비하려 하나니 제군은 나의 지도에 잘 신행(信行)하기를 바라노라”(<회보> 제41호)고 서술돼 저축조합의 설립 취지도 살펴볼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저축조합이라는 공동체를 운영해 근검절약 정신을 강조하면서 초기교단의 재정 기반을 쌓게 했다. 그리고 이는 방언공사와 법인성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돼 새로운 결사운동(結社運動)과 같은 면모로 드러난다. 

저축조합의 조합장은 소태산 대종사였으며, 최초 자금은 소태산 대종사가 구호동 가산을 정리해 모은 금액 400원과 제자들의 저축금 200원, 천정리 부호 김덕일에게 빌린 자금 400원으로 했다. 이를 가지고 구수산에서 나오는 숯을 사들였고, 매입한 지 1년여 만에 시세가 오르면서 10배의 이익을 얻게 됐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숯의 시세가 변동이 생기게 된 원인에서다.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소태산 대종사와 조합원들은 길용리 앞 갯벌을 막는 간척사업(방언공사)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원기5년(1920) 소태산 대종사가 제법성지 부안 변산으로 입산하자 저축조합은 발전적으로 해체하게 됐고, 제자들은 이 조합 운동을 고향에서 각각 새롭게 전개했다. 김기천은 백수면 천정리에 ‘천정조합’을 설립 운영했으며, 이동안은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마을에‘묘량수신조합’을 설립해 길용리 저축조합의 정신에 따라 소비 절약과 근검 저축을 장려했다.

교단사적으로 저축조합은 교단 초기의 3대 사업이라 할 수 있는 방언공사와 법인성사와 결부되고 있다. 원기2년(1917) 저축조합 운동을 벌였고, 원기3년(1918)에는 방언공사가 진행됐으며, 원기4년(1919)에는 법인성사가 이뤄지는 등 1년 단위로 교단 최초의 큰 사업들이 이뤄졌다.

[2024년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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